북한 관리들은 말을 할 때 늘 "우리 공화국은…" 하고 시작한다. 왜 일까. 독일 철학자 칸트는 전쟁 없는 영구 평화를 위한 제1요건으로 모든 나라가 공화정 국가여야 한다고 주창했다. 북한 스스로도 공화국임을 강변해야 하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리라.
1972년에 개정된 북한 헌법 서문을 보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을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라고 명기하고 '영원한 공화국의 주석으로 높이 모신다'고 하고 있다. 2019년까지 14차례의 개정이 있었지만 이는 불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목을 그리 주목하지 않는 듯하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주석직 승계를 놓고 예측이 난무하였다. 헌법 서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도 말이다. 북한 세습체제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3대째가 되니 제법 반발이 있었던 모양이다. '노예제 사회로 역행한다'는 벽보가 나붙고, 장성택과 김정남은 이런 연유로 제거되었다. 그러면 과연 북한 정권은 이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모순을 덮을 수 있는가.
'혁명성'(인민민주주의)은 북한 정권의 존립 명분이다. 2008년 2월 '6자회담'의 성공을 위해 뉴욕 필하모니가 평양을 방문했다. 미국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평양에서 미국 국가와 북한 국가를 나란히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국제 뉴스 거리였다.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이 연주되었다.
연주가 끝나고 우리 측 앵커는 한 현지 중년 여성에게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평소에 좋아하고 자주 듣는 곡"이라면서 "흑인, 인디언들의 애절한 삶과 그 심경을 느끼게 됐다"고 가르치듯 또렷한 목소리로 답한다. 소위 계급투쟁의 시각이다. '신세계로부터'라는 곡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곡은 미국으로부터 초빙을 받은 드보르자크가 그곳에 머물면서 받은 전혀 새로운 세계의 역동적인 감동을 곡에 담은 것이다.
이 시기에 발표된 첼로 협주곡, 현악 4중주 '아메리카' 등은 모두 그러한 신선한 영감에서 얻은 드보르자크의 대표작들이다. 흑인, 인디언 운운은 참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다. 드보르자크가 들었으면 기가 찼을 것이다. 적이냐 아니냐의 이분법적 계급의식은 '혁명성'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북한 주민들의 일상은 물론 가장 순수해야 할 음악(예술)의 영역에까지 예외없이 침습해 있다.
남북경협 문제로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오후 5시쯤 되어 TV를 켰다. 이 시간대는 대개 어린이 방송 시간이라 과연 어떤 프로그램이 나오는지 궁금해서였다. 6‧25전쟁 영화가 나왔다. 유엔군에 밀려 후퇴하는 상황에서 패잔병으로 구성된 구월산 유격대를 그린 영화다. 놀랐던 것은, 주역이 유격대원이 아니라 10세 정도 되는 어린아이들이라는 점이다.
이 아이들이 유격대원과 어우러져서, 미군을 상대로 유선 단절, 철도 노선 바꿔치기 등을 하며 전원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고, 당으로부터 받은 붉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미군의 '만행'도 곳곳에 섞어 보여준다. 어릴 때부터 소위 미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을 주입하여 남조선 해방을 위한 강인한 혁명전사로 만들어야(헌법 제10조)하는 그 세뇌 현장이었다.
우리의 어린이 방송은 어떤가. 무한 가능성을 안고 있는 동심(童心)에 초점을 맞춘다. '참'(眞)의 세계는 동심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며, 더욱이 앞으로 펼쳐질 시대는 다원‧조화‧창의로 상생‧융합하는 대자유의 영역이다. 어찌 간단한 차이겠는가.
북한식 인간 개조의 끝판 왕은, 온 주민을 '정치적 생명체'로 엮으면서 완성된다. 즉, 육체적 '생명은 부모로부터 받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생명은 오직 수령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한다.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에 보면, '당과 수령이 안겨준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간직하여…사업 실적으로 보답'(제8조)하고 유훈은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제5조)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하면서 온데간데없이 무오류의 신정(神政)체제에서나 볼 수 있는 교시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 때는 '정치적 생명을 제일 생명으로 여기고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관철할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 때에 와서는 '백두혈통'을 가미하면서, '정치적 생명체론'은 가히 세습체제의 정당한 근거가 되었다.
최근 최고인민회의(14기 7차, 9월 7일)는 수뇌부가 공격을 당하거나 그럴 우려가 있을 경우 핵무기를 사용한다고 마침내 법제화했다. 온 주민에게 '수령 결사 철옹성이 되자'면서 수령과 노동당은 서로의 독점적 지위를 위해 주거니 받거니 공생해 온 지 오래인 것이다.
'가까이 있는 이들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이들은 찾아 오는 것'(近者悅 遠者來)이 정치라고 했다. 국내 탈북민만 약 3만3천 여명이다. 북한은 '(수령의) 숭고한 인덕정치로...하나의 대가정으로 전변'했고, '사람중심의 세계관'(제3조)을 지향하여 모든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제8조)한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북한을 떠나려는 주민들이 많은가. 환상을 버려야 한다.
세습 권력과 주민은 서로가 다른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1964년 서독 함보른 탄광을 찾은 우리 대통령의 감동 어린 일화는 있어도, 똑같이 외화를 벌기 위해 러시아, 중국으로 나간 벌목공 등 노동자들을 찾았다는 세습권력자들의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잖은가. 힘들게 벌어온 외화로 우리는 제철소, 조선소를 지어 산업 기반을 다졌지만, 그 돈을 어디에 쓰는지조차 알 길 없는 '공화국' 북한이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2003년부터 매년 북한인권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는 유엔총회에서도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했다. 그간 정부는 적극과 소극을 오갔다. 지난 정권은 북한 자극을 이유로 기권하거나 아예 불참했다. 북한이 싫다고 넘어온 사람을 눈 가리고 수갑을 채워 사지로 몰아넣은 반문명적 행각까지 보인 정권이니 이상할 건 없겠다. 북한인권대사 임명이 전부가 아니어야 한다.
인권을 넘어 힘들어 하는 북한주민들이 더이상 탈북을 망설이지 않도록 하고, 70여년간 우상화‧혁명화로 유린되고 파괴되고 잃어버린 '본래 모습'을 되찾고 미래를 함께 하도록 국내는 물론 유엔‧국제사회와 손을 맞잡아야 한다. 정부의 대북정책에 관한 인식의 일대 전환과 역할을 기대해본다.
주체사상에 깊숙이 관여한 바 있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무산계급 독재에 의한) 집단주의적 사랑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전대미문의 전제권력을 낳게 된 역사의 오류를 범했다"고 자책했다. '북한판 교조주의'는 칸트에 의하면 비밀‧선동, 특히 폭력과 친숙한 구조다.
평화 공존, 나아가 평화통일의 최대 장애요인이며, 북한이 위험한 근본 이유가 된다. 오늘도 북한 관리들은 '우리 공화국…'을 입버릇처럼 되뇌고 있다.
윤광섭 전 국가안보회의 위기판단관, 예비역 육군소장, 정치학 박사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주진우, 김민석 해명 하나하나 반박…"돈에 결벽? 피식 웃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