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제내리 이재민만 260여명…집 안 흙범벅, 생활도구도 못 건져
"먼저 떠난 우리 영감, 밥 한 술도 대접 못해"
"추석 쇠러 산 돈배기, 냉장고 째로 떠내려가"
"집이 물에 잠겨 앉을 곳도 없는데 명절이 다 무슨 소용인가요."
8일 포항시 남구 대송면 제내리 마을. 태풍 '힌남노'가 휩쓸고 간 뒤 이틀여가 지났지만, 이곳 골목엔 아직도 진흙밭과 쓰레기로 변해버린 가재도구들이 가득했다.
지대가 약간 높은 땅에는 며칠 동안 햇볕이 들며 물이 모두 말랐지만 흙범벅으로 변해버린 탓에 마치 황사바람처럼 연신 뿌연 먼지가 피어오른다.
졸졸 새어나오는 수돗물로 집 안과 가재도구를 쓸어내던 주민들은 고작 몇 개를 솎아내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는 모습이다.
현장에서 만난 한 주민은 "물 난리 때는 몸 하나 빠져나오느라, 태풍이 지나간 후는 가재도구 하나라도 건지느라 진이 빠진다"며 "대비 못한 포항시나 정부도 원망스럽고, 이렇게 고통을 준 하늘이 제일 원망스럽다"고 한숨을 쉬었다.
태풍으로 현재 대송면 제내리에는 26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중 100여명 정도가 임시구호소인 대송다목적복지회관에서 생활 중이다. 이날에도 줄지어 늘어선 텐트 바깥으로 팔순을 넘긴 할머니들이 누워 힘겨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구호소에 있던 정화자(82) 씨는 "어제 집에 가봤는데 건질 살림이 하나도 없더라. 혈압약이며 당뇨약을 매일 먹어야 하는데 며칠째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니 곧 쓰러질 것 같다"면서 "지난 주말에 차례를 지내려고 돈배기(상어고기)와 소고기를 사놨는데 냉장고 채로 그냥 떠내려갔다. 올해는 죽은 우리 영감 밥 한 술 해주지 못할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다"고 울먹였다.
시골마을 특성상 대송면 제내리에는 대부분 노인 인구가 살고 있다. 한 주민은 '이재민들의 70~80%가 칠순을 훌쩍 넘긴 늙은이들'이라고 귀띔했다.
해병대 등 군 장병들이 7일부터 마을에 투입돼 도로 복구 및 파손된 주택 정리 등을 돕고 있지만, 덩치가 큰 부분만 담당할 뿐 집안의 세세한 곳은 결국 주민들의 몫이다.
하지만, 노인들이 감당하기에는 피해가 워낙 넓은 탓에 언제나 일상생활을 회복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주민 이모(78) 씨는 "집 입구를 덮었던 흙더미를 군인들이 쓸어줘서 이제야 집 안을 정리하고 있다. 너무 힘이 없어 그릇 하나 닦고 쉬었다가 물걸레질 한번하고 또 쉬었다가 한다"며 "정화조며 싱크대며 청소해야할 곳이 너무 많은데 엄두가 안된다. 추석 때 서울에 있던 아들 내외가 온다고 하니 이번 명절에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끼리 쉬지도 못하고 내내 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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