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변질 쌀 배급은 병 주고 약 주는 셈!

입력 2022-08-18 14:30:00 수정 2022-08-18 18:03:32

해방 후 식량난 시달린 대구…1948년 7월, 쌀 배급 받은 부민 31만 명 달해
상한 쌀 배급하거나 부정 수급 적발 되기도…물가 폭등에 쌀값도 치솟아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9월2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9월2일 자

'~식량 시책을 담당하고 있는 당국에서는 그 무슨 의도인지 요즘 와서는 변질 된 쌀을 배급하며 먹기 곤란한 안남미를 주는 등 또 말썽에 말썽을 도우는 준급 미배급이 있다 해서 일반은 이야말로 약 주고 병 주는 격이라는 원성과 아울러 이에 대한 원성은 한결같이 높아가고 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9월 2일 자)

해방 후 시간이 흘러도 식량난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애초 쌀의 수확 예상치가 어긋났던데다 최고가격제 실시 등 미군정의 정책실패가 뒤따랐다. 쌀값을 시장가격보다 낮게 책정하자 가격은 더 오르고 쌀 수급마저 막혔다. 모리배의 매점매석과 지주의 횡포도 보태졌다. 그 와중에 일본으로의 쌀 밀수출도 이뤄졌다. 국내보다 많게는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팔렸다. 일본으로부터는 귤 같은 과일이 밀수입됐다.

식량 사정의 악화는 배급 대상자 증가로 이어졌다. 1948년 7월의 경우 배급을 받는 대구부민은 31만 명에 이르렀다. 봄보다 2만 명이 늘었다. 그해 연말에는 4만 명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출산아의 증가와 맞닿아 있었다. 또 여러 지역에서 대구로 이사 온 전입자가 늘어난 영향도 있었다. 배급 대상자의 급증으로 부민들의 고통은 가중됐다. 식량난이 상업 도시 대구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근을 해결할 뾰족한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부민들이 기댈 곳은 쌀 배급이었다. 당국은 배급 쌀을 원활히 확보하는데 매달렸다. 그렇지만 배급 쌀은 모자라기 일쑤였다. 1948년 여름의 경우 대구부는 외국에서 들여온 쌀 6천 석과 국내산 3천 석을 확보했다. 농사를 짓지 않은 집을 대상으로 11월 말까지 매일 1인당 5작씩을 주기로 했다. 잡곡도 일부 배급하기로 했다. 5작은 한 줌 정도의 작은 양이다.

그런데 배급 쌀을 먹고 난 뒤 설사와 복통을 호소하는 부민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쌀 빛깔은 보통 쌀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먹고 나면 탈이 났다. 밥을 지으면 소금물에 탄 듯 짠맛이 났다. 도저히 먹을 수 없었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허기를 채울 요량으로 먹고 나면 복통과 설사가 뒤따랐다. 쌀에서는 냄새마저 났다. 상한 쌀이었다.

쌀이 상한 것은 부실한 보관 때문이었다. 시설 없는 창고에 넣어둔 벼에 습기가 찼지만 이를 건조 시킬 수 없어 방치했다. 도정업자 중에는 이런 변질된 쌀과 괜찮은 쌀을 가마니에 반반씩 섞은 후 찧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일제시대에는 창고에 넣어둔 곡물에 대해 두달마다 검사를 했다. 해방 후에는 이 같은 규정이 사라져 검사마저 없어졌다. 게다가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인도차이나산 안남미를 배급했다. 먹을 수 없는 변질된 쌀과 입맛에 맞지 않는 쌀을 배급하자 부민들은 '약 주고 병 준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2월8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2월8일 자

'~3개월 전 대구부가 부민에게 배급 못한 7천 석의 잡곡이 여태까지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는 문제로 부민의 조소거리가 되고 있거니와 이 문제로 하여금 부와 식량사무소 양자 사이에는 의견이 맞지 않은 험악한 대립 기세를 보이고 있다. 의견을 들어보면 수개월 전부터 전기 11월 부민용(1인당 4승5합) 잡곡 7천 석을 지령한 바 있었으나~' (남선경제신문 1948년 2월 8일자)

부민들의 고통은 변질된 쌀의 배급에서 끝나지 않았다. 배급체계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부민들은 굶주림으로 신음하는데 잡곡은 3개월 넘게 창고에 방치되기도 했다. 대구부가 부민에게 배급하기로 한 7천 석의 잡곡이었다. 부민들은 분노를 넘어 체념했다. 대구부와 식량사무소는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바빴다. 대구부는 운송난으로 창고에서 쌀을 꺼내오지 못했다며 이는 식량사무소의 업무태만 때문이었다고 했다. 반면에 식량사무소는 쌀의 인수 자금을 준비하지 않고 수수방관 한데서 보듯 대구부가 쌀을 부민에게 배급할 의지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쌀 배급을 둘러싼 부정 배급도 끊이지 않았다. 사람 숫자를 부풀려 배급을 받는 것이 가장 흔한 수법이었다. 부내 칠성정의 정회장이었던 김달수는 89명의 인구를 232명으로 둔갑해 식량을 배급받다가 적발됐다. 쌀 대신에 설탕을 배급한다며 선금부터 받아 말썽을 빚기도 했다. 남산동 신남 식량배급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설탕의 배급대금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 주민들의 비난이 빗발치자 경북도 식량 당국이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식량 배급의 와중에도 양곡 물가는 제멋대로 치솟았다. 부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한 말에 150원가량 하던 쌀이 며칠 만에 250원으로 또 270원으로 폭등했다. 폭등한 쌀마저 구하기가 힘들었다. 배급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부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이중의 고통이었다. 거기에다 변질된 쌀을 부민들에게 배급하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기진 배를 안고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다. 지금이야 그때와 같은 굶주림은 없다. 다만 고물가와 민생고는 시시때때로 서민들을 억누르고 있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