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식물과 군인, 꽃과 총, 아름다움과 전쟁의 대비

입력 2022-08-19 13:49:30 수정 2022-08-22 07:24:33

미술사 연구자

천경자(1924-2015),
천경자(1924-2015), '정글 속에서', 1972년(49세), 종이에 채색, 227.3×162.1㎝, 서울미술관 소장

꼭 50년 전인 1972년, 천경자가 베트남전쟁 종군화가단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전장을 다녀와서 그린 '정글 속에서'다. 당시 월남전이라고 했던 이 전쟁에 정부는 10명의 화가를 '국방부 주관 월남전 한국군 전선시찰 화가단'으로 파월해 기록화를 그리게 했다. 천경자는 유일한 여성화가였다. 이마동을 단장으로 박영선, 김원, 김기창, 장두건, 임직순, 박서보, 박광진, 오승우 등과 함께 천경자는 군용기를 타고 문공부 서기관의 인솔에 따라 필리핀 미군 기지를 거쳐 사이공으로 갔다.

최전선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림으로 기록하는 종군화가의 임무는 종군기자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러나 모험과 여행을 좋아한 천경자는 이국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금붕어가 산소를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고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 써놓았다. 오고가는 도중의 공항에서 월남전 위문공연에 나선 가수 하춘화, 배뱅이굿의 명창 이은관을 만나기도 했다.

화가들은 백마부대와 맹호부대에 다섯명씩 배치됐는데 천경자는 맹호부대였다. 군용 콘세트 막사(Quonset hut)에서 잤고 매일 헬기를 타고 전방을 다니며 스케치했다. 병사들은 화가들을 위해 모델이 돼 총을 들고 포즈를 취해주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천경자는 이 그림과 '꽃과 병사와 포성'을 여름과 가을 동안 열심히 그려, 그해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월남기록화전'에 출품했다.

'정글 속에서'는 150호 크기 대작이다. 화면 왼쪽 아래에 한자로 '1992년 천경자 작'을 서명해놨다. 열대식물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전체를 덮었다. 연두와 초록을 주조로 노랑, 보라, 주홍, 하양 등 신비로운 색채의 각양각색 잎사귀와 꽃 위로 노란 도롱뇽, 군청색 나비도 보인다. 밝은 꽃나무 그늘 사이사이 철모에 나뭇잎을 꽂고 소총을 든 병사들이 적의 동태를 살피며 잠복 중이다. 검게 위장한 얼굴에 흰자위만 선명한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총을 겨눈 모습이 매복 작전의 긴장을 실감나게 한다.

전쟁의 최전선에서 참혹한 장면도 목격했지만 천경자 화가는 그녀답게 열대의 꽃과 식물로 가득한 전쟁기록화를 그렸다. 식물과 군인, 꽃과 총이 병렬되며 자연과 문명, 아름다움과 전쟁의 대비가 처연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데모 진압대를 향해 화염병 대신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자를 그린 영국화가 뱅크시의 벽화 '분노, 꽃을 던지는 자'(Rage, the Flower Thrower)가 떠오른다. 전쟁과 분노를 미술의 주제로 삼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 무엇인가를 되묻는 작품들이다. 꽃의 아름다움으로.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