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값 폭락] 쌓이는 재고, 쌀값 폭락에 농민 한숨..."풍년? 전혀 달갑지 않다"

입력 2022-08-21 17:30:00 수정 2022-08-21 20:58:16

쌀값 1년 넘게 하락세…지난 5월엔 5년 평년 가격 밑돌기까지

예년보다 이른 추석에 햅쌀 출하 시기도 빨라진 가운데 전국 농협의 쌀 재고가 전년 대비 70%가량 늘어난 41만t을 기록하는 등 쌀값 폭락이 우려되고 있다. 강원도 한 미곡처리장 관계자는
예년보다 이른 추석에 햅쌀 출하 시기도 빨라진 가운데 전국 농협의 쌀 재고가 전년 대비 70%가량 늘어난 41만t을 기록하는 등 쌀값 폭락이 우려되고 있다. 강원도 한 미곡처리장 관계자는 "지난해 8월에는 이 창고가 텅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넘치는 재고로 쌀값 폭락이 이어지자 벼농사 농민들의 한숨이 깊다. 농협과 민간의 RPC(미곡종합처리장) 등이 쌀값 안정을 목표로 지난해 수매한 쌀 재고가 이미 곳간을 가득 채웠다 보니 올해 수매가 및 산지 가격은 더욱 내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쌀값 폭락 심각…내년 벼농사 포기 농가 속출할 것"

21일 경북 예천에서 벼농사를 짓는 이모(59) 씨는 올해 풍년이 예상되지만 우울하기만 하다고 했다. 물가는 치솟는데 반해 유독 쌀값만 폭락하고 있어서다. 1년 넘게 하락세를 이어오던 쌀값은 20㎏ 기준 가격이 전년보다 1만원 이상 떨어졌다.

이 씨는 "쌀이 넘쳐나니 쌀값이 1년 넘게 떨어졌다. 올해는 일조량이 많아 쌀 생산량이 더 늘어날 텐데, 공급이 느는 만큼 쌀값은 더 떨어질 것"이라며 "매년 가을이면 고개숙이며 익은 황금빛 벼가 반가웠는데 올해는 전혀 달갑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경주 최대 곡창지대인 안강읍 안강리에서 6천여 ㎡ 논농사를 짓는 소농 이재희(70) 씨도 "이번 봄여름 고생 많이 했는데 적자를 보게 됐다. 인건비와 농약값, 종자대 등 모든 물가는 올랐는데 쌀값만 폭락했다"며 "내년엔 벼농사 포기 농가들이 속출할 것"이라고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는 "농민들은 도시로 나간 자식들에게 땅을 물려 줄 수 없어 별 수 없이 농사를 지속하는 소농 고령자가 대부분"이라며 "농사를 지어도 수익이 없으니 생활비 걱정에다 빚만 늘게 됐다"고 길게 한숨 쉬었다.

의성군 가음면 농부 박수현(60) 씨도 처지가 비슷하다. 박 씨는 논 약 1천㎡에서 한해 4천포(40㎏ 조곡 기준)가량 소출을 올리고 있다.

그는 "올해 비료값과 유류대 등 생산 원재자값은 2배, 인건비는 30% 가량 각각 올랐다. 반면 정부가 쌀값 안정을 목표로 농협·민간을 통해 사들이는 쌀 수매가격은 지난해보다 5천~1만원 내릴 것이라는 얘기가 나돈다. 내 경우 4천만~5천만원의 손실이 예상돼 걱정이다"고 말했다.

영주 한 농가에서 추석용 햅쌀인 광복쌀을 모내기 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는 무관함. 매일신문 DB
영주 한 농가에서 추석용 햅쌀인 광복쌀을 모내기 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는 무관함. 매일신문 DB

◆올해 쌀값, 작년보다 22%↓…RPC 수매공간 부족에 악순환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 5일 기준 20㎏ 쌀 한 포대 가격은 4만3천93원으로 전년 동기(5만5천580원)보다 22% 내렸다.

산지 쌀값 상황도 비슷했다. 지난달 25일 기준 경북 산지 쌀값을 보면 80㎏ 1포 가격이 17만5천672원으로 전년 동기(22만3천424원)보다 21.4%(4만7천752원)이나 내렸다.

'곳간'에 넘쳐나는 쌀도 가격 폭락 악순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정부는 쌀값 하락을 막을 목적으로 연간 예상 쌀 소비량을 웃도는 초과 공급 물량만큼 '시장 격리' 매입 절차를 이어가고 있다. 매입 주체는 주로 농협과 민간 산지유통업체다.

현재 농협·민간 RPC는 이미 많은 쌀을 수매해 보관 중이다 보니 장기간 보관에 따른 창고 부족, 폐기 부담 등을 이유로 점차 낮은 수매 의지를 보이고 있다.

경북농협에 따르면 매년 7월 말 기준 농협·민간 RPC의 쌀 재고량은 ▷2018년 14만1천톤(t) ▷2019년 22만2천t ▷2020년 17만5천t ▷지난해 18만8천t ▷올해 22만6천t 등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비 RPC의 보유 재고량도 ▷2018년 3만1천t ▷2019년 8만t ▷2020년 4만8천t ▷지난해 4만9천t ▷올해 20만2천t으로 나타났다.

수매 수요가 하락하니 자연히 이곳에서 희망하는 수매 가격도 하향 책정된다. 수매 가격이 떨어지면 산지 쌀값도 잇따라 내린다. '쌀값 하락' 악순환의 고리를 공고히 하는 셈이다.

의성군 민간 RPC 2곳(합동·한가위)의 경우 올해 쌀 1포 수매가격을 지난해보다 1만3천~1만5천원가량 낮췄다. 수매량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다른 1곳(삼안)은 아직까지 수매량과 수매가 모두 미정이다.

예년보다 이른 추석에 햅쌀 출하 시기도 빨라진 가운데 전국 농협의 쌀 재고가 전년 대비 70%가량 늘어난 41만t을 기록하는 등 쌀값 폭락이 우려되고 있다. 지난 4일 강원도 내 한 미곡처리장 창고에 쌓여 있는 대형 쌀 포대. 해당 미곡처리장 관계자는
예년보다 이른 추석에 햅쌀 출하 시기도 빨라진 가운데 전국 농협의 쌀 재고가 전년 대비 70%가량 늘어난 41만t을 기록하는 등 쌀값 폭락이 우려되고 있다. 지난 4일 강원도 내 한 미곡처리장 창고에 쌓여 있는 대형 쌀 포대. 해당 미곡처리장 관계자는 "지난해 8월에는 이 창고가 텅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신곡 수매도 문제, 작년 재고 못 털면 올해 농가소득 1조5천억↓

수매가격 하락을 감안하더라도, 올해 수확분 신곡을 보관할 저장고가 없다시피 하다는 점 역시 문제시된다.

경주농협에 따르면 지역 11개 농협 창고에는 지난해 수매분 재고가 너무 많아, 올 가을 조곡을 수매해 보관할 공간이 거의 없다.

최덕병 안강농협조합장은 "현재 조곡 40kg 1포대 시중가가 4만원까지 떨어졌다. 수매가와 시중가의 차액이 2만원으로 벌어지면서 올해 경주농협은 쌀값으로만 모두 70억원대 적자를 볼 것"이라며 "정부 차원의 대량 구매 등 긴급 대책이 시급하다"고 목소리 높였다.

김희산 농협의성군지부 농정지원단장도 "재고 소진시기도 예년보다 늦을 전망"이라며 "올해도 지난해와 비슷한 물량을 수매할 전망이지만 수매가는 현재로선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경북농협은 올해 작황으로 미뤄볼 때 쌀 생산량이 평년작 이상일 것으로 내다봤다. 벼 재배 면적이 1만㏊가량 줄어든 것으로 파악됐으나 생육 상황은 평년보다 좋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지난해 수확한 쌀 재고를 제때 처리하지 못할 경우 올해 수확기 벼 매입가격이 40㎏ 기준 5만5천원 안팎에 형성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는 2019년(6만2천464원)과 2020년(6만9천653원), 지난해(6만7천686원) 가격보다 7천~1만4천원가량 내린 가격이다.

그 피해는 농민들이 고스란히 떠안는다. 경북농협에 따르면 벼 매입가격이 1만2천원 하락할 경우 농가소득은 총 1조5천억원 줄어든다. 농업계는 올해 수매 시기쯤에도 20만t의 쌀이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북농협 관계자는 "정부 도움이 절실하다. 과잉공급 물량을 해소하고자 구곡 재고를 공공격리 방식으로 추가 수매하고, 정치권·지방자치단체와 소비자를 대상으로 쌀 소비 운동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