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책무더기와 서재의 풍경, 민화 책거리그림

입력 2022-07-15 12:08:40 수정 2022-07-20 10:05:46

미술사 연구자

작가 미상,
작가 미상, '책거리' 2폭, 종이에 채색, 우 64×31.9㎝, 좌 52.8×27㎝, 도쿄 일본민예관 소장

조선 후기에 보다 많은 사람이 그림을 누릴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환경이 됐을 때 그런 수요에 응답해 민화가 나타났다. 민화는 행복한 삶에 대한 바람을 담아 생활공간을 꾸몄던 그림이다. 감상화가 회화 고유의 예술적 감흥으로 감상자를 만족시켜주며 수집되고 보존되는 문화적 교양물로서의 그림이라면, 민화는 길상과 장식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며 생활 속에서 활용된 실용을 겸한 그림이다.

민화 중에 책과 문방구를 중심으로 부귀와 자손번창을 상징하는 소재를 함께 그리는 책거리그림이 있다. 책거리는 문치주의 국가인 조선에서 출세를 위한 필수 자질인 학식에 대한 존경, 범사회적인 학문 숭상, 고된 육체노동에서 제외된 지식층의 고상한 생활에 대한 부러움 등에서 나온 그림이다.

도쿄 일본민예관의 '책거리' 2폭은 이 기관의 설립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1957년 지인으로부터 기증받아 두 폭 병풍으로 표구됐다. 좌우 폭의 크기는 조금 다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그림에서 큰 영감을 받아 자신의 민예미 이론을 일본 민화에서 조선 민화로 확장하게 된다. '책거리'를 기증받은 후 쓴 '조선시대의 민화'(민예 1957년 11월호)가 그의 우리나라 민화에 대한 첫 글이다.

'책거리'는 오래 사용된 듯 물감이 떨어져 나간 곳과 표면이 낡은 곳이 보인다. 녹색, 황색, 주황색, 남색, 검은색, 흰색 등 다양한 색을 사용했지만 먹을 섞어 색상의 순도와 밝기를 가라앉힌 색감으로 인해 기품 있는 분위기의 그림이 되었다. 직선은 자를 대고 그었고 물건마다 들어간 문양은 직선과 곡선을 반복했다. 세밀하게 중첩한 다채로운 무늬의 향연이 독특한 장식미와 고급스러움을 발산한다.

쌓이고 포개진 책 더미의 기상천외한 구성과 형태, 의외로 정교하고 사실적인 세부 묘사, 우아한 색채, 정성스러운 무늬 등이 기묘하게 어울렸다. 오른쪽 폭은 책 더미 앞에 나무 재질로 보이는 필통이 있고, 필통 좌우엔 포도를 담은 그릇이 있다. 책과 필통 속의 간찰, 두루마리, 접부채 등은 학식과 그에 어울리는 생활을, 값비싸 보이는 그릇은 부유함을, 알이 주렁주렁한 포도송이는 자손번창을 상징한다.

왼쪽 폭에는 포도 대신 씨 많은 오이가 있고, 펼쳐놓은 책 위에 붉은 실의 실다리 안경을 그렸다. 안경을 벗어 읽던 책 위에 놓아두고 잠시 나간 듯한 현장감의 설정이 재미있다. 책은 중국 초나라 우국 시인 굴원의 '이소'다. 여름은 밀린 독서로 피서하는 계절이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