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 경희대 교수
"국내에 단어가 유입된 계기는 'Fate/stay night'의 흑화 세이버를 시작으로, 리즈 시절의 일애갤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당시 전투력이 충만하던 일애갤은 타입문넷과 상당한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큭큭, 흑화할 거 같습니다'란 문장이 있었고…." '나무위키'에 나오는 '흑화'의 정의 일부를 옮긴 거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지만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당연히 알 거다. 흑화라는 게임 세상 용어를 꼰대들의 세상인 정치권에 유행시킨 장본인 아닌가. 나라고 알았을 리가 없다. 한때 게임광이었던 막내 딸에게 물어보니 금방 '알지'라고 답이 나왔다. 영어로 '아쿠마타이즈'(akumatize)라고 한다는 정보까지 알려줬다. 내친김에 흑화의 설명을 좀 더 읽어 보았다.
"평범한 캐릭터가 모종의 이유로 갑자기 어두워지며 냉혹, 비정해지는 것을 여러 작품에서 멋있게 표현하기 때문에 일부 사람에게 크게 어필하는 소재이다. 흑화로 인해 아군 캐릭터가 적군이 될 경우 엄청난 파워업을 하게 된다." 아마도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람들이 이 대표의 행보를 우려하거나 기대(?)하는 것 같다. '이준석 다음 타깃은 윤 정부?'라는 기사는 흑화로 인해 적군이 된 아군 캐릭터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게임의 설정을 생각한 것 같다.
이 대표 자신이 "제가 흑화하게 하지 말아 달라. 저같이 여론 선동 잘 하는 사람이 흑화해서 그러고 다니면 기대해도 될 거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원권 정지 6개월 징계를 받은 이후 일부 기사는 "이준석, 2018년 안철수 저격곡 '바람의 빛깔' 링크"라는 제목을 달았다. 유난히 '저격' '직격'이라는 기사를 많이 생산해 오던 이 대표가 본격적인 '대여 투쟁'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을 나타낸 것이다. 징계 후에는 본인의 말처럼 '여론 선동 잘 하는 사람이 흑화해서' 윤석열 정부까지도 공격하려 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인 듯하다.
하지만 필자는 이 대표가 흑화하지 않도록 자제하는 게 옳은 길이라고 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이 대표의 과거 행적은 언급하지 않겠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당내 인사들과의 갈등도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잠시 멈추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꼰대식' 고담준론 교훈을 설파하려는 게 아니다. 이 대표의 정치적 미래를 두고 현명한 선택을 하라는 얘기다. 당장 11일 오전 국민의힘 최고위원회 회의에 참석할 것인가? 당 기조국의 유권해석에 따라 권성동 원내대표가 대표 직무대행을 선언한 상태다. 참석할 경우 몸싸움 등 볼썽사나운 모습만 연출할 뿐이다. 자업자득이든 권력투쟁이든 이 사태의 본질은 정치적이다. 법적 투쟁 방법은 본인의 권리이겠지만 그것보다 정치적으로 풀어야 맞는 것이다.
지금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때 쓰는 정치적 언어가 있지 않나. "경위야 어찌 되었든 물의를 빚은 것을 사과드립니다." 이 대표의 다음 행보는 '투쟁'일 것으로 누구나 예상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SNS에 '저격' 글을 올리고 쉼 없는 인터뷰를 통해 정부 여당을 진흙탕으로 끌고 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시끄럽게 떠드는 것보다 더 큰 반향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잠시 떠나는 것도 좋다. 6개월 휴가로 생각하고 전국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강원도부터 전라도, 제주도까지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국민의 호소를 들어봐라. 국민의 마음을 울리는 정책이 거기서 나올 수 있다. 대신 윤 정부 지지를 읍소한다면 20일 만에 윤 정부의 지지율이 회복될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력은 화려하지만 정치의 목적은 이 땅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거 아닌가.
"간혹 흑화하였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과정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거나 하는 통에 목숨을 잃는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 홀로 모습을 감추는 경우도 존재한다." 흑화를 잘 아는 이 대표니까 이런 얘기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한때 응원했던 이 대표가 흑화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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