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빅토리 노트

입력 2022-06-30 11:22:55 수정 2022-07-02 06:45:27

이옥선·김하나 지음/ 콜라주 펴냄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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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 노트(이옥선·김하나 지음/ 콜라주 펴냄)
빅토리 노트(이옥선·김하나 지음/ 콜라주 펴냄)

"하나야! 아빠와 엄마는 벌써부터 이름을 마련해놓고 너를 기다렸단다."

카피라이터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하나의 어머니가 딸을 낳은 날부터 다섯 살 생일까지 기록한 육아일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제목인 '빅토리 노트'는 노트 제조사가 당시의 유행에 따라 해당 일기장의 표지에 인쇄해놓은 문구다.

1976년 12월 16일, 진주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고 어머니는 그날부터 빅토리 노트에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46년 전 처음 쓰인 일기는 아이가 다섯 살 생일을 맞는 날까지 계속되고 약 20년 뒤 딸의 손에 쥐여진다. 대학 시험에 떨어진 직후였다.

"니 스무 살 생일 되면 줄라꼬 감춰놨던 건데, 힘이 될까 싶어 좀 땡겨서 주는 거다." 김 작가는 갑작스럽게 인생의 첫 5년을 선물 받게 된다. 이후로 그는 매년 생일이 되면 빅토리 노트를 꺼내 읽었다. 처음엔 일기 속의 엄마보다 어렸던 그는 어느덧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 바라보는 각도가 달라짐에 따라 보이는 풍경도 시시각각 바뀐다.

이 책은 작가의 어머니인 이옥선 여사의 기록을 통해 1948년생 70대 여성의 삶과 이 시대에 대한 관점을 보여준다. 일기 원본을 스캔해 책에 싣고, 현재 시점의 엄마와 딸의 코멘트를 더한 방식으로 구성됐다. 역사 교사 출신 어머니가 틈틈이 써온 에세이 16편도 포함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한양대 사학과를 졸업해 진주의 삼현여자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학교에서 2년 6개월 만에 퇴임했다. 같은 학교 국어 선생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첫 아이를 낳고 다시 진주중학교에서 근무했으나 부산으로 발령받은 남편과 주말부부 생활을 이어가기가 힘들어 일을 그만뒀다. 부산으로 옮겨 둘째를 낳고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이 책은 산부인과가 흔하지 않던 시절 한 아이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유선전화가 없던 시절 어떻게 사람이 만나고 살아왔는지 등을 생생하게 전한다. 유선전화를 개통하던 날의 기록을 통해 우연히 주어진 번호가 훗날 한 가족의 휴대폰 번호가 돼 때로는 전화번호가 가계도가 되기도 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녹아 있어 주택정책을 비롯해 부마항쟁, 10·26 사태를 겪어낸 보통 사람들의 삶도 담아낸다.

이제는 엄마 나이를 훌쩍 넘어버린 딸은 육아일기를 통해 그 시절의 엄마를 다시금 바라본다.

"1948년생인 엄마는 이때 겨우 서른 무렵인데 벌써 애 둘의 엄마이고, 남편은 나돌아다니는 술쟁이여서 독박육아를 하면서도 노트를 펴고 엎드려서 플러스펜을 꺼내 내가 귀엽다고 한 자 한 자 쓰고 있다. 그렇게 쓰인 글자가 내 눈앞에 있다. 45년이 지나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꿍했던 나의 마음은 너무 작은 것이 되어 어느새 형체도 없이 녹아버린다. 이 일기는 매번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놀라울 정도로 힘이 세다. 서른 무렵의 엄마는 이제 40대 중반이 된 나보다 훨씬 크다."

물론 육아일기라 해서 감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솔직담백한 엄마의 성격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과거 남편의 사진을 보고서는 "지금도 '헤어빨'이 없으면 인물이 안 난다"라며 직설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여기에 딸은 "이 책에서까지 이런 대쪽 같은 정직함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라며 재치 있는 반응을 보인다.

"침을 흘리고 울기만 하던"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서 일기는 한층 입체적이고 재미가 더해진다. 어디선가 욕을 배워 와서는 여과 없이 내뱉기도 하고 "쉬하고 싶을란다", "밥바 먹고 싶을란다" 같은 이상한 말을 지어내는 딸의 모습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기도 한다.

딸은 책에서 "빅토리 노트를 펴볼 때마다 나의 태어남을 기뻐하고, 작고 연약한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보듬어준 누군가가 세상에 있었음을 문장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바라건대 이 책을 읽은 어느 엄마가 자신의 아기에 대한 육아일기를 써준다면 나의 이 책은 누군가에게 씨앗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육아일기를 쓰고 싶은 부모에게 길라잡이가 될 수 있는 책이다. 340쪽, 1만9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