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 수필가
나는 지금 강 어디 즈음에 와 있을까? 흐르고 흘러 지금 내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강. 또 살아가야 하는 강. 마른 들을 적시고, 밤낮없이 돌아가는 공장 기계를 씻기고, 아비의 임종에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린 상주의 눈물을 씻기고, 저녁이면 강은 지는 노을처럼 착잡하게 무거워져서는 말없이 하류로 흘러갔다. 그런 강을 보고 온 날에는, 나는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마른 울음으로 울었다. 그러면 내면 어디서부터 침체된 말이 흘러나왔다. '굴하지 말고 명징하고 단아하게, 기쁘게 흘러가라.'
샛강에 나가 난만하게 놀던 나를 기억하는 강, 이제는 늙어가는 나를 적시는 강.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들판을 기어 송아지의 목을 적시고, 매운 마늘밭을 적시고서야 모심는 아비의 발을 씻기우는 강. '같이 가자, 같이 가자'하며 강은 이름 없는 풀들의 발을 씻기우며 흘러간다.
내가 웃자라는 동안, 강도 함께 늙어간다. 강에 뿌리내리고, 뿌리와 뿌리를 맞대고 아슬아슬하게 돋아나던 풀, 비바람에 꺾이지 않고 더욱 깊숙이 뿌리내리는 풀, 풀은 강을 닮아 말갛고 강은 풀을 닮아 푸르다. 그래서 저물녘 강가에 서면 풀 내음 머금은 강 비린내가 먼저 반기곤했다. '나는 자랄 것이다. 나는 풀처럼 무성해질 것이다.' 스스로에게 세뇌하던 밤, 나약한 풀들이 야합한다면 언젠가 세상도 변할 거라고 희망한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면 우리, 두려울 것도 없겠다. 어느 조간(朝刊) 사회면에 스물넷 김 군이 컨베이어 벨트에 깔려 죽었고, 스물아홉 김 모 씨가 용광로에 빠져 죽었다. 이 땅의 억울한 죽음들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길이 아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의 말씀처럼 나는 지상의 고통을 인내하며 물안개 무정하게 피는 강가에 서 있다.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울지 마라 풀들아, 겁먹지 마라 풀들아. 강은 풀을 안고, 풀은 강을 안고 우리, 어제보다 오늘은 더 단단해져 한 걸음 한 걸음 내일로 나아가자. 절망하지 마라. 좌절하지 마라. 불의에 무릎 꺾는 건 생각지도 마라. 온몸을 밀어 정신이 번뜩 드는 고통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 두 눈 부릅뜨고 나를 지켜라.
여기, 어떠한 경우에도 뒤로 밀려나지 않는 거대한 강이 흐른다. 수런수런 흘러가며 썩은 물을 찾아 호기롭게 외치는 강. 교화되지 않을 구린내 풍기는 기도 따위에 손 뻗어 맞잡지 않겠다. 그들이 휘두르는 온갖 편협에 무능하게 쥐어짜 준 내 진액을 품고 저기 젖은 빨래가 펄럭인다. 내 진액을 닦아 낸, 내 소금기를 닦아 낸, 배운 것 없는 옷들이 먼저 젖어 울었다. 강을 비켜 살아가는 당신도 언젠가는 이 강에 찾아와 목 놓아 울게 될 날 있을 게다.
내가 있는 곳이 가장 밑바닥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여기서부터 환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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