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정연원 씨의 부인 고 박영희 씨

입력 2022-06-26 13:54:41 수정 2022-06-26 17:23:37

"당신이 없는 공백, 열심히 사는 것으로 메꿔나가고 있어요"

정연원 씨가 부인 고 박영희 씨가 작고하기 전 함께 간 여행에서 찍은 사진. 가족 제공.
정연원 씨가 부인 고 박영희 씨가 작고하기 전 함께 간 여행에서 찍은 사진. 가족 제공.

날씨가 푹푹 찌기 시작합니다. 이 여름이 지나가고 나면 당신을 떠나보낸 가을이 다가오겠지요. 벌써 22번째 맞이하는 가을이네요.

대학 시절 나를 만나 결혼한 뒤부터 당신은 날 의지하며 살아왔었지요. 나는 당신이 항상 내 옆에 있어 줄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항상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일찍 들어가기는커녕 못 들어가는 날도 많았고 당신과 함께 뭔가를 했던 기억도 많지 않네요. 그렇게 당신이 내 곁을 일찍 떠나갈 줄 알았다면 당신과 같이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 걸 그랬습니다.

노래는 나보다 조금 못 불렀지만, 음식 솜씨와 옷 고르는 센스 만큼은 전문가 못지 않았던 당신 덕분에 같이 사는 동안 내가 어깨를 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게다가 우리 딸과 아들들이 당신 음식 때문에 집에 일찍 올 정도였으니 당신의 음식은 정말 우리 가족을 단결시키는 힘이기도 했지요.

지금도 아이들은 당신이 만들어 준 음식 이야기를 많이 한답니다. 나는 제일 많이 생각나는 게 당신이 만들어 준 돼지고기 두루치기예요. 일하다가 컨디션이 안 좋아지거나 몸살기가 생기면 당신은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막걸리 세 병과 함께 준비해줬죠.

막걸리와 함께 당신의 두루치기를 먹고 나면 다음날 언제 아팠냐는 듯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신 제삿날 전후해서 같이 사는 큰며느리에게 두루치기를 만들어달라고 말한답니다.

아, 새로 불어난 식구 이야기를 안 했구려. 우리 큰 딸과 아들 둘, 모두 결혼해서 자식 낳고 잘 살고 있답니다. 집안 일을 처리해나가는 걸 보면 마치 피아노 3중주처럼 자식들과 사위, 며느리가 합심해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맞춰가며 뚝딱뚝딱 해치워나가고 있어요. 이렇게 화목한 자식들과 손주들을 보며 행복해하다가도 당신 생각이 날 때면 이 행복을 당신과 함께 즐기지 못해 미안하답니다.

사실, 당신이 떠나간 뒤 내 삶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당신을 떠나보내고 난 뒤 몇 달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더군요. 시력을 상실한 채 한 5년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하던 일도 그만둬야 했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갔죠.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고,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었음을 적응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어요. 그럴 때마다 옆에 당신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크게 다가왔어요.

하지만 그냥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는다면 당신이 슬퍼할 것 같았어요. 나중에 당신을 만났을 때 떳떳하기 위해서라도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했죠. 그래서 녹음된 책을 1년에 600권 넘게 읽는 것을 목표로 책을 계속 읽고 나니 마음이 정리가 되더군요.

그러다 어느정도 시력이 회복돼 앞에 있는 사물이 어렴풋하나 보이는 정도가 됐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하루에 2만보씩 걸으며 건강도 지키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필부문에 내가 쓴 수필이 당선되기도 했어요.

그렇게 당신이 없는 자리의 공백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 메꿔나갔어요. 당신이 먼저 떠나갔기 때문일까요, 나 또한 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됐어요. 그리고 긍정적인 삶을 사는 방법도 배웠고요.

아직 당신이 떠나간 가을이 오지 않았지만 이건 약속할게요. 당신을 다시 만날 때까지 당신의 제사상 앞에서 열심히 절할게요. 살아있을 때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을 많이 만들지 못하고 며느리, 사위, 손주의 사랑을 나 혼자만 차지한 미안함과 당신 덕분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고마움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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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매일신문이 함께 나눕니다. '그립습니다'에 유명을 달리하신 가족, 친구, 직장 동료, 그 밖의 친한 사람들과 있었던 추억들과 그리움, 슬픔을 함께 나누실 분들은 아래를 참고해 전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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