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교동 69번지 최부잣집. 300년 12대를 이어
만석(萬石)의 부를 지켜 온 가문. 어떻게 일구고, 어찌해
문파(汶坡) 최준 선생은 집 한칸 남김없이 기부했을까요?
가문에 처음 부를 일군 이는 그의 9대조 최국선(1631~1681).
비법은 집 안팎을 다스린 6훈(六訓)에 있었습니다.
①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부(富)와 귀(貴)를 다 쫓는 건 멸문의 화를 부르는 지름길.
그런 역사는 없었습니다. '양반 신분증' 진사에 족했습니다.
②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당시 소작료 7~8할에 최부자는 5할을 받았습니다.
추수한 볏단마저 반반, 교동 논은 '단갈림'이었습니다.
소출이 더 나, 지주가 논을 내 놓으면 다퉈 최부자에 일렀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지만 그가 사면 기뻤습니다.
③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부를 일으키되 부당하게 이웃에 원한을 사는 일을 경계했습니다.
④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하루 100명은 다반사. 258명 저녁상을 차린 기록도 있습니다.
먼 길손엔 하루치 양식에, 노잣돈까지 쥐어 보냈습니다.
후한 대접에 팔도에서 찾아들어 고급진 정보를 놓고 갔습니다.
⑤ 사방 백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현종(1671)때 흉년으로 영남에서만 2백여 명이 굶어죽자
곳간을 헐고 죽을 끓였습니다. 활인당은 최고 무료급식소였습니다.
⑥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근검 절약은 부의 시작. 안방 살림에 필수 덕목이었습니다.
④~⑥훈은 오롯이 안채의 몫. 며느리, 종부가 가문을 지켰습니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일제에 나라를 뺏기자
마지막 만석꾼 최준(1884~1970) 선생은 결단했습니다.
항일 의병에, 국채보상에, 독립운동에 사재를 털었습니다.
백산무역을 설립해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한 거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습니다. 전재산을 독립자금에 부었습니다.
광복을 맞자 치욕은 두번 다시 안된다고 인재를 키우겠다며
지역 유림과 힘을 합쳐 1947년 대명동에 (옛)대구대학을,
1955년엔 경주 향교에 계림대학을 세웠습니다.
현금 40만원·고서 7천200여 권, 대지·과수원·산림 수십 만평에
최부잣집 고택까지, 남은 재산을 조건 없이 기부했습니다.
그 (옛)대구대와 계림대의 씨앗이 영남대와 영남이공대로 자랐습니다.
지금 최부잣집 솟을대문엔 '영남학원 소유' 문패가 걸렸습니다.
최준 선생의 큰 뜻이 영남학원에서 쭉 이지길 기대합니다.
독립운동·인재양성에 300년 만석의 부를 희사한 최부자 정신.
그것은 부자의 품격, '나눔과 상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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