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배경 외엔 모두 허구…멜로에 정치 대결 더해져
'낙화놀이' 연출 화제…영화 같은 영상미 호평
과거 사극 단순한 연출에 머물러…여성 PD들이 사극 변신 주도
최근 몇 년 간 사극은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스타일의 변화다.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더해진 사극들은, 그간의 사극들과는 사뭇 다른 접근법을 보여주고 있다. KBS 월화드라마 '붉은 단심'은 바로 그런 사극의 변신을 보여준다.
◆멜로와 정치의 결합
'붉은 단심'은 조선시대라는 배경만 가져왔을 뿐, 그 안에 담겨진 이야기는 모두 상상으로 만들어진 허구다. 반정을 일으킨 좌의정 박계원(장혁)과 그 무리들에게 모든 권력이 넘어간 조정. 세자였던 이태(이준)는 그들에 의해 어머니가 자결하고 세자빈으로 들인 유정(강한나)의 가문 또한 멸문의 화를 입는 비극을 겪게 된다. 간신히 감옥에 불을 지르고 유정을 궁 밖으로 탈출시킨 이태는 박계원과 반정공신들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기회를 노리고, 그러면서도 신분을 속인 채 보름에 한 번씩 궁 밖으로 나가 유정을 만난다.
죽림원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유정은 이태가 왕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연모하는 마음을 드러내는데, 복수를 해야 하는 이태는 국혼에서 좌의정과 유일하게 싸울 수 있는 병판 조원표(허성태)의 여식 조연희(최리)를 중전으로 들여 세력을 키울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려 한다. 그래서 유정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지만, 이태 역시 유정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박계원은(물론 유정이 과거 자신에 의해 멸문당한 유학수의 여식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를 거짓으로 질녀라 꾸며 국혼에 내보냄으로써 권력을 항구하게 가지려 한다.
이처럼 '붉은 단심'의 스토리는 이태와 유정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이태와 박계원이 벌이는 치열한 정치 대결 이야기가 엮여 있다. 혼인이라고 하면 사적으로는 그저 멜로의 사랑이야기에 머물 수 있는 것이지만, 국혼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력이 없는 왕이라면 국혼이 외척의 힘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정치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붉은 단심'이라는 사극의, 차별적 매력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사적인 감정들이 피어나는 상황과 정치라는 공적인 사안들이 부딪친다는 점이다. 이태는 사랑을 위해서는 유정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지만, 자신의 세력을 얻기 위한 정치와 복수를 위해서는 유정을 버리고 병판의 여식을 중전으로 맞이하는 게 맞다. 그래야 박계원과 반정 공신들을 밀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붉은 단심'의 멜로는 퓨전사극이라고 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정치적 상황이 묵직한 무게감을 싣고 있고, 무엇보다 비극적인 정조가 깔려 있다. 사실 현대극에서 자못 비장한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는 이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것은 현대의 사랑이 그만큼 현실적인 걸 요구하고 따라서 비극적 멜로보다는 로맨틱 코미디류의 발랄함과 경쾌함이 더 정서적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운명적이고 비극적인 멜로는 이제 사극이 품게 됐다. '붉은 단심'은 여기에 정치로 인해 갈등하게 되는 햄릿 같은 왕을 세움으로써 그 사랑이야기를 더욱 묵직하게 그려낼 수 있게 됐다.
◆사적 감정이 공적인 파란으로
'붉은 단심'의 멜로와 정치의 결합은 그러나 단순히 두 장르의 소재적인 결합에 머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적인 감정이 거기에 머물지 않고 공적인 파란으로 이어지는 흥미로운 광경을 보여준다. 즉, 애써 유정을 밀어내지만 그에 대한 연심을 접을 수 없는 이태는 왕이라는 공적인 위치에 맞는 선택만을 하지 않게 된다. 또 유정 때문에 생겨난 어떤 감정들은 그것이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국정에 영향을 미친다. 보통 사가에서 남녀가 하는 부부싸움은 그저 갈등으로 끝나지만, 궁에서 벌어지는 왕과 여인들 사이의 감정 대립은 조정을 피비린내로 만들 수 있는 파장으로 비화될 수 있다.
이러한 권력자들의 갈등이 피비린내 나는 궁궐에서의 전쟁으로 비화되는 이야기는 일찍이 중국의 거장 장예모 감독의 '황후화' 같은 영화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황후화'가 황실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배신이 스펙터클한 액션으로 펼쳐보였다면, '붉은 단심'은 권력다툼을 심리전에 가까운 정치대결로 풀어낸다.
여기서 주목할 건 '붉은 단심'이 보여주는 영화적 미장센이 느껴지는 화면 연출이다. 보름에 한 번씩 만나는 이태와 유정이 다리 위에서 마주할 때 그 배경으로 '낙화놀이'가 연출된 장면은 '붉은 단심'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화제가 됐었다. 불꽃이 떨어져 내리고 바람에 흩날리며 화면 가득 채워지는 그 아름다운 장면 속에서 이태와 유정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불꽃이 삼켜버릴 듯한 느낌으로 연출됐다. 그건 두 사람이 가진 연모의 정이 그만큼 활활 타오른다는 걸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것이 향후 만들어낼 이들의 위태로운 운명을 전조처럼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박계원의 질녀로 중전 간택에 들어온 인물이 다름 아닌 유정이었다는 사실을 이태가 알게 되고, 또 그로 인해 이태가 그저 선비가 아니라 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유정의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순간을, 눈발이 날리는 배경에서 서로 등을 지고 눈물을 흘리는 광경으로 연출한 장면과 대비된다. 즉, '붉은 단심'의 연출은 그저 아름답고 압도적인 장면을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광경 속에 서 있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그리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이 퓨전사극의 영상이 마치 영화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다.
◆여성 PD들이 이끈 사극
사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의 사극만 하더라도 연출에 영상미나 미장센을 기대하는 부분은 별로 없었다. 그보다는 몰입하게 만드는 대본의 스토리나 구성이 더 중요했고, 그걸 극대화하는 정도의 연출이 활용됐다. 그건 매주 급하게 찍어 편집해 올려야 하는 당시의 열악한 제작환경도 영향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영화만큼의 연출을 요구하지 않는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암묵적 허용' 같은 것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과거 KBS '용의 눈물' 같은 공전의 히트를 쳤던 사극을 연출한 김재형 PD가 쓰는 방식은 극단적 클로즈업 같은 다소 단순한 방식들의 연출이 적지 않았다. 물론 퓨전사극의 전성기를 만들었던 이병훈 PD의 경우는 그보다는 훨씬 더 영상미가 있는 연출을 보여줬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선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최근 사극의 변신을 주도하는 여성 PD들이 주목받고 있다. '왕이 된 남자'의 김희원 PD에 이어 '옷소매 붉은 끝동'의 정지인 PD, 그리고 '붉은 단심'의 유영은 PD가 그들이다. '돈꽃'이나 '빈센조' 같은 장르물 연출로도 주목을 받았던 김희원 PD가 연출한 '왕이 된 남자'는 사극도 이처럼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옷소매 붉은 끝동' 역시 연출부터 의상, 미술, 음악까지 빼놓을 게 없는 작품으로 호평 받았다. 그리고 이제 그 바통을 '붉은 단심'이 이어받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여성 PD들일까. 그건 남성‧여성의 성차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사극의 색깔이 달라지면서 생겨난 변화라고 보면 될 듯싶다. 즉, 이들 사극은 갈수록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특성들을 보인다. '왕이 된 남자'의 유소운(이세영)이 그렇고,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덕임(이세영)이 그러하며, '붉은 단심'의 유정이 그렇다. 훨씬 섬세한 감정이나 심리의 표현이 중요해졌고, 최근 들어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OTT 등의 등장으로 무너지면서 연출도 변화를 요구하게 됐다.
'붉은 단심'은 그래서 그 정치 심리극을 방불케 하는 대본의 몰입감도 그렇지만, 그 심리를 담아낸 영상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끄는 사극이다. 사극은 이처럼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에는 여성 PD들이 전면에 서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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