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지음/ 창비 펴냄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면 이후 몇 달 안에 우리는 이미 그의 부재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일(우리는 그것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다)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우리는 그가 이해하지 못할 말로 그에게 인사를 하게 된다."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일반통행로'를 통해 말했듯,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써 일어나는 '어떤 일'이 있다. 단순히 '서서히 삭고 스며들어 사라진다'는 물리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대상의 부재는 우리가 더 이상 그 사람과 무언가를 함께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나 죽은 자는 남겨진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되진 않는다. 남겨진 사람은 죽음을 통해 의미를 찾기 마련이다. 그래서 떠나도 떠난 게 아니다. 뚜렷하게 부재하지만 더욱 선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대상의 부재를 경험한 이들 중 누군가는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그 사실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눈을 돌릴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이었든 아니든, 우리는 지금 이곳에 없는 존재들과의 기억을 곱씹으며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기억한다. 누군가의 부재를 해석하는 방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쌓아 온 중견작가 이장욱이 네 번째 소설집 '트로츠키와 야생란'을 출간했다. 이번 책에는 '잠수종과 독', '귀 이야기', '유명한 정희' 등 2020년부터 2년 동안 쓴 단편 아홉 편이 담겼다. 이 중 '잠수종과 독'은 올해 초 이상문학상 우수작에 뽑힌 작품이다.
이번에 실린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부재'와 '기억'이다. 삶을 끝내 등진 이들과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며 떠난 이를 품고 사는 인물들이 이야기를 그려낸다. 인간의 내면을 깊게 파헤치지만, 드러나는 것은 복잡미묘한 감정들이다.
이상문학상 우수작으로 선정된 잠수종과 독은 외과 전문의인 공, 그리고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의 연인 현우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목받는 사진작가인 현우는 인터뷰 장소로 하던 중 건물이 불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현우는 운전 중 황급히 조수석의 카메라를 집어 들었고, 정신이 쏠린 탓에 교통사고를 당해 숨지게 된다.
그리고 공의 눈앞에는 혼수상태의 방화범이 누워 있다. 방화범인 중년 남성은 건물 복도에 온통 기름을 뿌리고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이성적인 공은 방화범이 현우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없음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그는 마치 잠수종에 갇힌 듯 끊임없이 심연으로 하강했다. 현우에 관한 기억이 계속해서 재생됐고, 공의 마음속에는 독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방화범 앞에선 공은 의사로서의 책임감과 상실감, 분노 사이에서 갈등하며 주사기를 든다.
"공은 자신이 공공연한 사형제 반대론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인간 사회가 한 인간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공공연한 살인을 시행해선 안 된다.… 하지만 죽어 마땅한 일을 저지른 자는 공공연하게 죽여야 한다.… 공은 자기 내면에서 충돌하는 모순을 물끄러미 느끼고 있었다."
표제작 '트로츠키와 야생란'은 '너'와의 추억이 담긴 러시아에 온 '나'의 이야기다. 환경단체에서 활동하던 '너'는 모함에 빠져 일을 그만두게 되고, 힘겨운 마음에 산에 갔다가 벼랑에서 떨어지게 된다. '나'는 모함의 주동자를 찾아 계단에서 밀치며 복수하지만, 이내 두려움에 쌓여 러시아로 도망을 가게 된다.
과거 '나'와 '너'는 러시아를 여행하며 '추억의 장소에 혼자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약속했다. 결국 원치 않았던 미래에 혼자 도착한 나는 '너의 부재'를 시리게 느낀다. 그곳에서 트로츠키라는 남자를 만난 '나'는, 그가 사는 장소로 숨어들기로 한다. 관광용 빙상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얼어붙은 호수 속 섬이다.
며칠이 지났을까.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낯선 확신'을 가지게 된다. 섬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하필이면 빙상차가 고장이 났다. 남은 선택지는 둘이다.
트로츠키가 말한다. "하나는 호수를 건너는 걸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가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 다른 하나는……지금 곧바로 출발해서 호수를 걸어서 건너는 것."
이 책은 '영원'의 세계로 간 이들과 '여기' 남아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이들이 서로 포개지고, 흩어지는 모습을 그려낸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과정이 '참으로 이상한데 결국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다는 경구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만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라는 뜻이면서 동시에,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라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중략) 어느 밤에는 제 곁에 물끄러미 앉아 있는 죽은 이들을, 곰곰이 보듬어보게 됩니다." 300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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