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혁 소설가
나는 소설을 창작할 때, 배경을 매우 중요시 하는 편이다. 기획 중인 작품 속에서 공간이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고 할지라도, 그 모델이 될 만한 곳을 일부러 찾아 몇 번이고 답사를 다닌다. 물론 답사를 통해 얻은 채집물들이 창작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는 힘들다.
이번에 기획하고 있는 소설은 반드시 답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핑계 삼아 홀로 경주 바닷가의 감은사지로 향했다. 내가 감은사지에 관해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삼국유사'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삼국유사를 한 편의 장대한 이야기책이라고 말할 때, 감은사의 창건은 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마감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폐망한 것은 태종 무열왕 때이지만,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당(唐)의 세력을 돌려보내고 실질적인 통일왕국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그의 아들인 문무왕에 이르러서였다.
그렇게 볼 때, 문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감은사는 곧 통일을 확인하는 중요한 상징물이었던 셈이다. 삼국유사를 통틀어 가장 비장한 결의를 말한 이는 문무왕이다. 그는 자신의 유서를 통해 이제 육지로부터의 모든 전쟁이 끝났으니, 자신은 그만 바다에 묻혀 저 먼 곳에서 찾아올 새로운 적에 맞서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래서였을까? 절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터에는 두 개의 커다란 석탑이 굳건히 서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에서도 '아, 감은사, 감은사여'라는 상당히 비장한 제목으로 감은사지를 소개하고 있었다. 흡사 머리가 헤싱헤싱해진 초로의 신사가 이제야 찾은 누이의 무덤 앞에서 목 놓아 그 이름을 부르는 느낌이랄까? 경주의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저자가 그토록 감은사를 애타게 부른 것을 보면 그 존재가 뭔가 대단한 감동을 준 것은 분명해 보였다.
화창한 봄날, 나는 오래된 두 개의 오 층짜리 석탑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소설적 영감을 얻으러 왔는데 자꾸만 비장해지는 감정 탓에 냉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감은사의 두 탑은 세속과 종교의 균형으로 천 년을 서 있는 것인지 모른다. 절이 서 있던 시간만큼 절이 사라진 세월이 흘렀다. 지금이야 정비가 되어 유적지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사실 오랜 세월 동안 이 마을의 사람들은 절터에 집을 짓고 살았고 논밭을 일구었다.
타작한 볏단은 기단석에 세워 두었고 손이 닿는 낮은 옥개석에는 고추와 가지를 널어 말렸다. 일상의 손길은 수없이 탑을 만졌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옥개석에 고추를 널던 아낙은 뱃일 나간 부모와 남편의 안녕을 허리 굽혀 빌었고 한가득 멸치를 잡은 남편은 만선의 고마움을 고개 숙여 표했을 것이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탑에서 뜀을 뛰었고 새들은 둥지를 틀어 교미를 하고 알을 낳았을 것이다.
'살고 비는' 가장 정직한 일상 속에 천오백 년짜리 탑이 오늘도 서 있다. '그 한 자리에서 천오백 년'이라고 중얼거리다가 나는 그만 목이 메어 왔다. 왠지 이번 소설, 완성하기가 쉽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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