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익명(匿名)의 오자(誤字)

입력 2022-05-10 20:23:23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차를 바꿀 때가 됐다. 새 차를 사겠노라 마음먹으니 한동안 온 신경이 차에 가 있다. 집도 옮기고 싶다. 자기최면이라도 거는 건지 분양 아파트 전단지가 고급 정보지로 보인다. 자식이 상급학교 진학을 앞두니 맹모(孟母)로 빙의하는 것도 당연지사. 입시 관련 정보에 해박한 이를 수소문하는 것도 임무다. 차, 집, 학교를 향한 욕구가 충만하니 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솔깃해진다. 무조건반사가 따로 없다.

관심 있는 것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건 인지상정이다. 음운도치와 오자(誤字)가 있는 문장을 자연스럽게 읽어내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예컨대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는 웃어른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했고, 경력이 풍부한 분들의 기능재부를 끌어내는 것도 일반적이었다"라는 문장에서 '웃어른 공경과 경력자 재능기부'를 금세 파악하는 건 물론, "정, 형신 차려. 총체적 남국이야"라 쓰여도 재깍 정신을 차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익명으로 가려진 것들을 억지 주장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지난 9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질의자인 민주당 최강욱 의원은 노트북 기증자 '한XX'가 한 후보자의 딸이지 않냐며 맹공했다. 같은 당 김남국 의원도 후보자의 딸이 '이모'(姨母)와 함께 논문을 썼다 주장했다. 알고 보니 '한XX'는 기업명인 '한국3M', '이모'(姨母)는 '이모 교수'를 잘못 본 것으로 추정됐다.

'모'(某)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빈번히 등장한다. '모일'(某日)처럼 확실하지 않을 때 주로 쓰였다. 범죄 혐의자의 프라이버시 침해를 우려해 성(姓)만 쓰면서 적극 활용된 글자이기도 하다. '모'(某)를 우리말 '아무개'로 대체하는 매체도 있다.

그들에게 '한XX' '이모'는 도드라져 보였을 것이다. 후보자를 공박할 무기를 발견한 순간 쾌재를 불렀을 거라 짐작한다. 그러나 익명이었다. 거기에 '주관적 확신'이라는 덫을 던져놓으면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만 걸리게 된다. 상대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걸려들었다고 제멋대로 해석한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짤짤이'를 외설 반열에 올려놓은 당사자들이다. 외부로 발설되지 않아야 할 해프닝일 텐데 온 국민이 생생하게 듣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