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혁 소설가
화장실을 찾아 고개를 빼 들고 유모차를 밀기 시작한다. 급하다고 무작정 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자의 옆에는 언제 어디로 튀어버릴지 모르는 럭비공, 여섯 살짜리 큰애가 여전히 코끼리 아저씨의 질펀한 엉덩이를 향해 감동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어디 보는 거야? 한눈팔다가 아빠 놓치면 어떻게 되는지 말했지?"
엄포도 그 때뿐이다. 동물원에서 한눈을 팔지 말라니? 그것도 여섯 살배기에게. 말하고 있는 그도 딱한 노릇이다. 결국 버럭 소리를 질러 아이를 끌고 온다. 풀이 죽은 아이가 터덜터덜 유모차 뒤를 따른다. 그마저도 못 미더워 한 손으로 유모차를 끌면서 한 손으로는 아이의 덜미를 잡아챘다. 눈치로 보아 엉덩짝을 틀어대는 꼴이 유모차에 타고 있는 막내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른 듯한데, 산 넘어 산이라고 스무 개쯤 되어 보이는 계단이 흡사 절벽처럼 버티고 섰다. '대체 화장실을 저런 곳에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동물원에 도착한 지 채 한 시간도 못 돼서 벌써 몇 번째 윽박질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서슬에 놀랐던 것인지 막내가 드디어 빽빽 울어대기 시작했고, 큰애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더 이상 양보는 없다는 듯 시종일관 버티기로 나온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순간, 그의 '슈퍼맨' 흉내는 끝났다는 것이다. 방송과 현실을 구별 못 한 어리석음이 결국 이런 사태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어린 시절 조금 맹하던 동네 형이 이소룡 영화를 보고 쌍절곤을 돌리다가 코가 깨지는 꼴이나 지금 그의 꼬락서니나. 그나저나 뜻하지 않은 휴가를 얻은 아내는 지금쯤 혼자 뭘 하고 있을까 하고 그는 망연히 생각했다.
결국 유모차는 계단 아래 버려두고 기저귀와 물병, 과자등속을 넣은 알록달록한 유아용 배낭을 짊어진 채 두 아이를 양팔에 매달았다. 드디어 20킬로그램에 도달한 큰애가 덜렁 오른팔에 사정없이 매달릴 때, 허방이라도 짚은 듯 그의 연약한 다리가 휘청한다. 생각해보니 아이들 챙기느라 점심도 옳게 먹질 못했다. 그제야 허기가 파도처럼 밀려왔을 때 그는 오늘 같은 날, 그러니까 어린이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기분에 빠지고 말았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그래 너희들은 자라고 아빠는…, 어지럽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니 '돌아온 아빠 슈퍼맨'들은 혼자 뭐든 척척 잘 해내던데, 왜 우리 두 공주님의 아빠는 기저귀 하나 가는 일이 이리도 어려운 걸까.
천신만고 끝에 화장실을 빠져나와 계단 아래부터 먼저 살핀다. 다행히 유모차는 그대로인데, 그 옆으로 낯선 유모차 한 대가 막 주차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또 한 명의 슈퍼맨 아빠. 상당히 건강해 보이는, 적어도 30킬로그램은 거뜬히 넘을 남자아이를 안고 어깨에는 커다란 캐논 600D 카메라와 뽀로로 배낭 하나를 걸쳤다. 숨을 헐떡이며 한발 한발 계단을 오른다. 마치 티베트고원을 오체투지로 넘는 수행자처럼,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닌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그저 운명으로 부여된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표정으로……. 세상 모든 슈퍼맨, 이번 어린이날에도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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