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시시각각] <97> 역사의 거울,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입력 2022-05-10 06:00:00

단종 태실을 비롯해 세종 아들 태실 18기(문종 태실은 예천 명봉사에 조성)가 조성된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세종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권을 찬탈하는 과정에 안평·금성대군(오른쪽 줄)과 영풍·한남·화의군(왼쪽 줄) 등 다섯 동생의 목숨을 빼앗고 태실을 파헤쳐 기단석만 남아있다. 오른쪽 맨 앞 수양대군(세조) 태실 앞 비석은 그가 등극하면서 세운 태봉비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단종 태실을 비롯해 세종 아들 태실 18기(문종 태실은 예천 명봉사에 조성)가 조성된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세종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권을 찬탈하는 과정에 안평·금성대군(오른쪽 줄)과 영풍·한남·화의군(왼쪽 줄) 등 다섯 동생의 목숨을 빼앗고 태실을 파헤쳐 기단석만 남아있다. 오른쪽 맨 앞 수양대군(세조) 태실 앞 비석은 그가 등극하면서 세운 태봉비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1977년 세종대왕자태실 복원 직전 모습(위)과 복원 직후 모습. 계유정난 등으로 훼손된 태실 5기의 일부 석물은 사라져 기단석만 남았다. 사진=성주 문화유산해설사 곽차순 제공
1977년 세종대왕자태실 복원 직전 모습(위)과 복원 직후 모습. 계유정난 등으로 훼손된 태실 5기의 일부 석물은 사라져 기단석만 남았다. 사진=성주 문화유산해설사 곽차순 제공
기단석 위 중동석과 개첨석이 사라진 금성대군 태실. 세조가 금성대군을 제거하면서 태실 석물도 산 아래로 굴려버렸다고 전해온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기단석 위 중동석과 개첨석이 사라진 금성대군 태실. 세조가 금성대군을 제거하면서 태실 석물도 산 아래로 굴려버렸다고 전해온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세조 태실과 태봉비 주변에 훼손된 안평대군(앞)과 화의군(뒤 오른쪽) 태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세조 태실과 태봉비 주변에 훼손된 안평대군(앞)과 화의군(뒤 오른쪽) 태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훼손된 세조 태봉비. 수양대군이 왕위(세조)에 오른 뒤 그의 태실 앞에 세운 비석에는 신하 홍윤성이 세조를 찬양한 글을 새겼으나 훼손돼 모두 사라졌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훼손된 세조 태봉비. 수양대군이 왕위(세조)에 오른 뒤 그의 태실 앞에 세운 비석에는 신하 홍윤성이 세조를 찬양한 글을 새겼으나 훼손돼 모두 사라졌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성주 석선산에서 내린 줄기가 봉긋 솟은 산중돌혈에 자리한 세종대왕자 태실. 당대의 발복을 위해 조성한 태실은 대부분 풍수가 수려한 명당 산 봉우리에 조성됐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성주 석선산에서 내린 줄기가 봉긋 솟은 산중돌혈에 자리한 세종대왕자 태실. 당대의 발복을 위해 조성한 태실은 대부분 풍수가 수려한 명당 산 봉우리에 조성됐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세종대왕자태실 인근 성주 태실문화관에 전시된 아기와 산모 이미지 조명. 이곳에는 조선시대 왕실 태문화를 비롯해 국내외 장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세종대왕자태실 인근 성주 태실문화관에 전시된 아기와 산모 이미지 조명. 이곳에는 조선시대 왕실 태문화를 비롯해 국내외 장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성주 태실문화관에 전시된 세종대왕자태실 구조 모형도. 지하에 태를 넣은 항아리를 묻고 다진 뒤 지상에 네모난 기단석 위로 중동석과 개첨석을 차례로 올렸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성주 태실문화관에 전시된 세종대왕자태실 구조 모형도. 지하에 태를 넣은 항아리를 묻고 다진 뒤 지상에 네모난 기단석 위로 중동석과 개첨석을 차례로 올렸다. 김태형 선임 기자 thk@imaeil.com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 8 ,세종대왕자태실.

유서 깊은 곳이지만 피바람의 아픈 역사가 서린 곳.

기단석만 휑한 다섯 태실에 중동석,개첨석이 간데없고

세조 태실 가봉비엔 글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500여 년 전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세종은 상왕, 태종 못지않는 아들부자였습니다.

소헌왕후가 낳은 대군 8명에, 후궁의 군도 무려10명.

가지가 많으면 바람 잘 날 없다 했던가요.

맏아들 문종의 대를 이어 그의 독자,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야심 찬 거사가시작됐습니다.

1453년 계유년. 참모 한명회가 휘갈긴 살생부에

수양대군은 단종의 보좌 세력인 황보 인·김종서 등

원로대신 수십 명을 숙청하고,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라이벌 안평대군에는 단종을 내몰고 왕좌를 탐하려 한다는

음모를 씌워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목숨까지 앗았습니다.

계유정란, 쿠데타로 왕권을 가로챈 수양대군(세조).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이에 반기를 들며

유배지 경상도 순흥에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자

세조는 또 그를 사육신과 함께 반역죄로 처형했습니다.

뜻을 같이한 영풍·한남·화의군도 피바람을 면치 못했습니다.

성주 태실엔 그 권력암투 역사가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후손이 발복하는 묘와 달리 당대 발복을 위한 태실.

세조는 정적 세력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다섯 동생의 태실과

등극 후 성주 법전리로 옮긴 조카 단종의 가봉(加封) 태실까지

쫓아가 더 이상 기를 못 쓰도록 무참히 파헤쳤습니다.

세조 태봉비에는 홍윤성이 그를 칭송하는 글을 새겼지만

한 글자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인륜도 버리고 왕권을 찬탈한

그가 밉다고 백성들이 싹 지웠다는 입방아만 난무합니다.

생명을 귀히 여긴 태실, 그 속에 깃든 나쁜 역사도 인류 유산.

조선왕조 태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중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역사의 거울 앞에서 찾는 사람들마다 혀를 찼습니다.

그땐 친아들, 지금은 정치적 아들로 보복의 나쁜 역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오늘, 한 권력이 가고 새 권력이 왔습니다.

권불십년, 좋은 역사를 갖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