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산골소녀

입력 2022-04-29 13:53:57

김한나 연극배우

김한나 연극배우
김한나 연극배우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집안 사정으로 가족이 잠시 흩어져 살았던 적이 있다. 아버지는 타지로, 큰오빠는 군대에 갔다. 작은오빠는 고3 입시생이라 홀로 고시원살이를 했다. 나는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게 됐다.

어머니와 내가 살던 곳은 파계사에서 칠곡 가는 방면으로 3~4㎞ 정도 떨어진 '당정마을'이라는 곳이었다. 마을 입구를 지나는 시내버스가 하루에 8대뿐이던 오지마을이었다. 그나마 파계사 버스 종점에는 시내버스가 종일 운행됐는데 거기에서 집까지는 인도가 없는 찻길 옆을 아슬아슬하게 30분을 걷고, 마을 입구에서 오르막길을 15분은 걸어 올라가야 했다. 가끔 운이 좋으면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마을 입구까지 갈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탄다는 것이 꽤 위험했던 것 같아 아찔하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과수원 농사를 짓는 분들이었다. 인심이 어찌나 후했던지 철마다 과일 수확을 마친 후에는 집 문 앞에 포도, 사과, 복숭아 등을 한 보따리씩 쌓아 두었다. 그 양이 둘이서 먹기엔 너무 많아서, 잼으로 만들어 빵에 발라 먹곤 했다.

당시 나는 반월당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는데 전학을 가기 싫어 굳이 팔공산에서 통학했다. 집 앞 정류장에서 아침 5시 40분에 버스를 타지 못하면 꼼짝없이 지각이라 그런 날은 어머니가 시내에 있는 학교까지 차로 등교를 시켜주셨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아침밥을 굶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텃밭에서 키운 상추와 달걀 프라이, 된장찌개를 넣은 비빔밥을 큰 대접에 담아 내 품에 안겨주고 운전을 하셨는데, 그 맛은 살면서 먹어본 비빔밥 중 단연 최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어쩔 수 없이 학교에 지각을 하거나 결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겨울에 눈이 너무 많이 내리는 날에는 차량 운행이 금지돼 학교를 아예 못 가기도 했다. 전교에서 유일하게 지각 처리가 안 되는 학생이었다. 집이 학교에서 너무 먼 거리에 있고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곳에 살고 있음을, 선생님들이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와 관련된 소문은 전교에 퍼져서 '산골소녀'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따로 학원에 다니지 않았던 나는 하교 후나 주말이면 마을 주변을 산책하며 그림도 그리고 귀여운 목소리로 지저귀며 날아가는 산새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휘파람을 불며 내가 산새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길가에 피어 있는 꽃과 나무를 보는 것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동그랗고 하얗게 피어 있는 수국을 가장 좋아했다. 20세기를 사는 질풍노도의 청소년치곤 꽤나 순수하고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어느덧 나는 불혹의 나이가 됐고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지내다 보니 그때의 순수함과 낭만은 가쁜 숨과 함께 옅어졌다. 이젠 내가 살았던 당정마을에도 아스팔트가 깔리고 나와 안부를 주고받던 산새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대단할 것 없었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을 보니 이제 나도 그리움을 먹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오늘은 집으로 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하얀 수국 한 송이를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