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유권자 등록을 적극 추진중에 있는데 부내에 떠도는 여론에 의하면 유권자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식량 배급을 않는다는데 3일 허 내무국장과 김 농무국장은 이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허 내무국장 담: 그와 같은 말은 모순되는 것이며 자유로운 선거 분위기에서 벗어나는 행언이다. ~그와 같은 말이 있다면 도 선거위원회에 속히 알려주어야 될 일이다. △김 농무국장 담: 그와 같은 방침은 없다. 누가 하는 말인지 우스운 말이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4월 4일 자)
곤궁한 시절, 봄이면 으레 등장하는 단어가 있었다. 보릿고개다. 보릿고개는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이전에 수확했던 곡식은 다 떨어졌고 보리는 아직 나오지 않은 때다. 해방 이듬해 춘궁기에는 굶주림이 심해 쌀을 달라고 관청에 단체로 몰려가는 일이 잦았다. 대구부는 응급대책으로 굶고 있다는 증명을 가져온 사람에게 쌀과 잡곡 1되씩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반발이 심해지자 모든 주민으로 대상을 넓혔다.
보릿고개의 비극은 끝이 없었다. 가족의 밥상을 차릴 수 없게 된 부녀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날 정도였다. 곡식의 수확량이 늘지 않은 상황에서 해방이 되자 귀환 동포의 숫자가 급격히 늘었다. 게다가 모리배의 매점매석과 지주의 횡포, 일본으로의 쌀 밀수출 등도 식량부족을 부추겼다. 미군정이 실시한 최고가격제도 식량난에 기름을 부었다. 쌀을 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통제하자 시중에 나돌던 쌀마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해방 3년째인 1948년에도 어김없이 봄은 보릿고개로 시작되었다. 여느 때와 다르다면 선거 준비와 함께 봄이 찾아왔다는 점이다. 제헌국회를 구성하는 국회의원 총선거였다. 애초 잡았던 5월 9일이 일요일이어서 다음날인 10일로 선거일이 정해졌다. 미국이 주도한 국제연합총회의 결정으로 남한지역에서만 선거를 치르게 됐다. 남한 단독선거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남북협상을 통한 단일국가의 기틀을 먼저 마련하고 투표를 하자는 반발이 나왔다. 당국으로서는 압도적인 투표율로 이 같은 정치적 부담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투표의 준비작업으로 유권자 등록을 시작했다. 유권자 등록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식량 배급과 관련된 소문이 쫙 퍼졌다. 유권자 등록을 하지 않으면 당국으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투표를 하는 사람에게만 식량을 배급하겠다는 소리였다. 주민들은 불안해했다. 힘겨운 보릿고개에 식량 배급마저 끊기면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주민들은 너도나도 유권자 명부에 등록했다. 경북도의 경우 짧은 시간에 137만 명의 유권자 중 100만 명을 가볍게 넘어섰다.
투표에 참여하려면 유권자가 스스로 사전등록을 해야 했다. 유권자 등록은 투표와 직결되었다. 그런 만큼 당국은 등록률을 높이려 애썼다. 유권자 등록을 하지 않으면 식량 배급이 없다는 소문은 주민들의 등록률을 높이는 유인책이 됐다. 전국적으로 95%가 넘는 유권자가 등록했다. 유권자 등록이 높게 나타나자 식량 배급과 연계한다는 소문은 쏙 들어갔다. 그 뒤 당국은 유권자 등록을 식량 배급과 연계하는 것은 자유투표에 반한다고 강조했다. 미등록 유권자를 조사할 계획도 없다고 덧붙였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 총선거에 여성대표로 김선인 여사를 적임자로 추천합니다. 세계 이목이 집중된 금반 5월 10일 선거로 민주국가를 건설하고 남북통일을 전제로 국회에 만일 여성대표가 없다면 민족적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대구 15만 여성은 총궐기하여 여성대표로 김선인 여사를 보냅시다.~'(남선경제신문 1948년 4월 28일 자)
유권자 등록이 끝나자 후보자들의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신문에 후보 추천 광고를 내는 방식이었다. 위의 기사는 대구선거구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여성 후보자 추천 광고였다. 신명여중과 경북여중 동창회를 비롯해 기독교, 천주교, 불교 부인회 등 각 여성 관련 단체들이 지지를 밝혔다. 후보의 추천 광고는 업종이나 분야별로 다양했다. 노동자·농민을 대변하는 후보는 노총 등 노동단체 등에서 추천 광고를 냈다.
선거유세도 점차 제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유세 장소는 주요 기념식이 열릴 정도로 단골 집회 장소였던 대구역이 손꼽혔다. 또 달성공원은 평상시에도 사람이 많은 편이어서 행사를 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서문시장처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도 인기가 있었다. 수성천이 선거유세 장소로 떠오른 것은 그 이후였다.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인원동원 등 불법‧편법 선거의 시비도 시간이 흐를수록 불거졌다. 이른바 막걸리와 고무신 선거로 이어졌다.
머잖아 지방선거다. 해방 후 투표는 생존의 절박성과 맞닿아 있었다.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조차 힘들었던 주민이 적지 않았다. 투표해야 식량 배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너도나도 나섰던 이유였다. 어찌 보면 지금보다 솔직한 표심이었다고 해야 할까.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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