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로 속삭이다(정표년 시조집/ 학이사/ 2017)
어느날 아침, 산등성 조붓한 오솔길을 걷는 중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끼손톱만큼 돋아난 새순을 보았다. 며칠째 계속되는 꽃샘추위에 그 새순이 자꾸 눈에 밟혔다. 휴일에 가서 살펴봐야지 생각하며 들락거리는 책방으로 향했다. 필요한 책을 찾아 옆구리에 끼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책장의 책을 보았다. 그러다 낯익은 이름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문학회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작가였다. 그날 나는 곱게 화장한 문우들 틈에서 햇볕이 침착된 구릿빛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한 문우를 통해 그녀가 도심 인근 봉촌리에 사는 시조시인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이상하게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내 속에 시인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책 '수화로 속삭이다'를 품에 안았다. 대구 달성 출신인 정표년 시인은 '말없는 시인의 나', '산빛 물빛 다 흔들고', '신의 섬으로 가서' 등의 시조집을 출간했다. 제1회 민족시가 대상 수상과 2017년 대구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136편의 시조를 담았다. '서성이는 가을', '동백꽃 때문에', '구름이 산허리 잡고', '일흔 오솔길', '잠자코 웃는 이유', '무심코 지난 일들' 등 6부로 나눠져 있다. 보석처럼 빛나던 때와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은 때가 있는 게 삶이다. 시인은 '하루'에서 시소같은 생을 징하게 살고 있다.
"날마다 주어지는/ 참 푸짐한 하루를 두고// 보석같이 먼지같이/ 시소를 타고 있다// 무거운 보석 다듬듯/ 가벼운 먼지 털듯"
'내 고향 봉촌리'는 삼대가 옹기종기 모여 사랑을 나누고 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무척 부러웠다. 흩어져 사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게 하는 마법 같은 시조이다. '딱 좋은 수치'는 반복되는 '딱 좋은'으로 인해 일흔살이 늦가을 쓸쓸한 때가 아닌 편안하고 넉넉하고 풍요로운 경지에 오른 나이임을 딱, 알게 한다.
"딱 좋은/ 7부의 길이가/ 얼마나 편안한지// 딱 좋은/ 7할의 부피가/ 얼마나 넉넉한지// 딱 좋은/ 일흔의 나이가 보이니/ 그 풍요를 알겠네."
요즘 '스며들다'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사전적 의미가 '밖으로부터 배어들다'인데 사람에게 스며든다는 표현을 유행처럼 하고 있다.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순간, 사람에 스며드니. 평범한 일상을 시조로 엮은 시인이 서문에서 그저 시조가 좋아서 놓지 못했다고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평범한 일상에 침식당하지 않는 시인의 책이 궁금하지 않은가.
최지혜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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