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그래도 되는 봄이니까요

입력 2022-04-06 11:23:58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하천 어디쯤 걷다 걸음을 멈추었다. 건넛마을이 아름다웠다. 가파른 산기슭에 여남은 집들이 층층이 들어앉은 작은 마을이었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은 지천으로 봄꽃들을 드리우며 깊이를 더했다. 맨손으로 화전을 일궈 목구멍에 풀칠하듯 살아온 세월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먼 먼 언제쯤 한 번은 살았을 법한 느낌이 낡고 오래된 마을로 나를 이끈다.

하천에는 해묵은 억새들이 마지막 울음으로 서걱대고, 묵은 울음 사이로 연둣빛 생명이 줄기차게 돋아난다. 아직은 시리겠지만, 저마다의 구색으로 봄을 향해 여린 발을 내린다.

키 낮은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내 그림자는 가장 짙고 낮게 물에 가 눕는다. 표정은 없고 무미건조한 생각들만 어른거린다. 바꾸지 못할 거면 묻어가라는 말이 뇌리에 고인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고 묻어가라니 어디까지 묻어가라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곱씹으니 울컥 화가 치민다. 자처해 내리꽂은 깃대엔 언제쯤 물이 오르고 꽃이 필 수 있을까. 바뀌지 않으려는 곳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건 바보라던 말, 내면이 혼란스럽다.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어느새 그리 오래되지 않은 상처를 끄집어내 가만가만 씻기운다.

마을에 다다르자 막 하천을 건너온 그림자가 젖은 몸을 널어 말린다. 어느 봄 어느 집 마당에는 막 부화한 병아리들 무리가 마당에 나와 쉴 새 없이 모이를 쪼고, 어미를 따라나선 네댓 마리 강아지가 서로 뒤엉켜 익살스럽게 몸 씨름을 하며 하루를 난다. 아직 세상을 배우는 중이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누가 들어줄 리 만무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이렇게 작고 초라하게 세상을 배우고 익히느라 안간힘을 쓴다.

가슴 언저리에 격정으로 이는 생각들을 잠재우고 가파른 길을 오른다. 고갯길을 더듬다 어느 빈집 마당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의 안식을 누린다. 은빛 햇살을 튕겨내는 요강과 툇돌에 가지런히 올려진 흰 고무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온기가 묻어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얼고 터지던 계절은 잊겠다. 연둣빛 싹이 돋는가 싶더니, 이내 연분홍 꽃이 줄지어 터지고, 허허롭게 비워졌던 산천이 깨어나 온통 찬란한 절정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풍성히 채워지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아름다워지리. 봄은 이렇게 소리소문 없이 왔다. 화르르화르르 어여쁜 꽃들, 용케 제 안식할 곳 찾아 잘도 피는구나.

고통을 뚫고 오는 봄이여. 얼마만큼의 시간을 감내해야 봄이라는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저리도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을 두고, 괜히 서글퍼지는 나른함과 무기력함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요. 허구한 날, 세상 패배자처럼 웅크리고 있는 내게, 어떻게 말간 오늘을 선물해 줄 수 있을까요. 봄이라고 모두 환희에 차 들썩이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치밀어 오르는 어떤 슬픔이 있거든 그래요, 일단 실컷 울어보겠습니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이 하도 좋아 눈물이 난다는 핑계를 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지요. 그러고 나면 내면 깊숙이 드리워진 봄에 나를 심겠어요. 그리고 다시 싹틔우고 자랄 거예요. 그래도 되는 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