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에 대하여(최민자/ 연암서가/ 2021)
밋밋한 시간을 즐기는 중 지인이 최민자론 평론을 보내왔다. 자주 다니는 중고서점에 검색하니 저자의 책이 한 권 있다. '사이에 대하여'. 아! 누가 사가면 어쩌지. 조급했던 마음에 급히 나섰던 발걸음, 책을 품고 느긋하게 돌아올 때의 밤 풍경은 새로웠다.
저자는 '에세이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피천득 선생님의 '어떤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는 상찬의 추천사를 받은 바 있다. 현대수필문학상, 윤오영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산문'과 '수필 오디세이' 편집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1장 지구별의 문법 ▷2장 침묵의 소리 ▷3장 본질은 없다 ▷4장 시계 무덤 ▷5장 생긴 대로 생각대로로 나뉘어 있다. 차례를 따라 읽다 보면 만물은 스스로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생명은 자연의 섭리이다. 물이 두텁게 쌓여야만 큰 배를 실을 힘이 생긴다. 딸, 아내, 며느리, 특히 친정엄마로, 또한 할미로서의 일상이 어떻게 인문학적 향기를 입는지 느낄 수 있다.
두부 예찬의 한 부분에서 "슴슴하면 슴슴한 대로, 얼큰하면 얼큰한 대로, 주연이듯 조연이듯 탓하지 않고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그는 어둠의 집에서 막 출소한 젊은이에게 숫눈 같은 육신을 송두리째 보시하기도 한다"(17쪽)고 나오는데, 이 문장은 두부가 성자가 되는 존재와 근원을 생각하게 한다.
스미고 물들이며 완성되어 가기에 사람은 인(人)이 아니고 인간(人間)이라 했다. "활자를 아무리 정연하게 배치해 두어도 사유(思惟)가 일어나는 곳은 행간(行間)이듯이 사건과 사연, 역사와 이야기가 생겨나는 것도 '사이'다. 마음도 마찬가지."(44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사이'란 무엇인가. 한곳에서 다른 곳까지, 또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까지의 거리, 보이지 않는 겹 속의 흐름에 잠겨있는 자신을 본다.
'마트료시카'는 큰 인형 속에 작은 인형, 작은 인형 속에 더 작은 인형을 싸안고 있다. 나는 아들이 결혼할 때 며느리에게 이 인형을 주었다. 이 속에는 말하지 않아도 비밀스러운 문법이 숨어 있다. 나이를 안으로 밀어 넣으며 푸른 피가 돌게 하는 나무들을 본다. 껴안고 껴안으며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기적임에 틀림없다.
한 권의 책으로 모퉁이의 안쪽들을 여행했다. 실종이나 방랑이 아닌 이상 최종 목적지는 제 앉은 자리임을 새삼 느낀다. 내 안의 나를 업로드시키는 멋진 귀환. 세상에서 가장 슬프다는 비탈리의 '샤콘느'를 들으며, 꽃이 피고 지는 봄날의 그 사이, 사이를 즐겨도 좋을 것이다.
정화섭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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