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엔터인사이드] 정통 로맨틱 코미디의 저력 '사내 맞선'

입력 2022-03-29 17:22:32 수정 2022-03-31 18:19:54

SBS 월화드라마 ‘사내 맞선’…뻔해서 펀(fun) 하다

드라마
드라마 '사내 맞선'의 한 장면. SBS 제공

'뻔하다'는 표현만큼 드라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없다. 하지만 예외가 탄생했다. SBS 월화드라마 '사내 맞선'이 그 드라마다. 뻔한데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는 반응이 나오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런 반전을 만든 걸까.

◆사내연애에 오피스 로맨스 더해

'얼굴 천재 능력남 CEO와 정체를 속인 맞선녀 직원의 스릴 가득 퇴사방지 오피스 로맨스.' SBS 월화드라마 '사내 맞선'을 설명하는 이 짧은 문구는 이 드라마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대충 이해하게 만든다. 한 회사의 대표와 직원이 벌이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더해진 밀당 로맨스가 그 핵심이다. 물론 정체를 속이고 친구 대신 맞선에 나갔던 신하리(김세정)가 하필이면 상대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 대표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정체를 숨기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하나 더해져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런 설정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다 어떤 결론을 맺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정체를 속인 신하리에게 화가 난 대표 강태무(안효섭)가 일종의 시련(?)을 주다가 점점 그에게 빠져들게 되고 실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드라마는 이런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스토리를 전개한다. 다만 재빨리 정체가 발각되는 상황을 보여주고, 대표와 직원이라는 현실 앞에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 생각해 거리를 두는 신하리와 그럴수록 더 다가오는 강태무의 이야기로 변주해가는 내용들이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또한 서브 로맨스로 차성훈(김민규)과 진영서(설인아)의 러브 라인 또한 전형적이지만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시청자들이 일종의 오락물로서 로맨틱 코미디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줬다.

물론 굉장한 서사나 무게감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드라마는 결코 아니다. 또 새로운 멜로의 서사를 제시하는 드라마도 아니다. 하지만 '사내 맞선'은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는 장르 본연의 맛인 달달한 로맨스와 밀도 높은 코미디의 웃음으로 한 시간 동안 별 생각 없이 몰입하게 해주는 드라마다. 그래서 대단히 성공할 거라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드라마는 의외로 큰 성취를 이뤘다. 4.9%(닐슨 코리아)로 시작한 시청률은 매회 상승해 10.8%(8회 기준)의 두 자릿수 최고 시청률를 기록했고, 나아가 넷플릭스를 통해 소개되면서 TV쇼 부문 글로벌 순위 4위(25일 기준)까지 올랐다.

드라마
드라마 '사내 맞선'의 한 장면. SBS 제공

◆피로한 현실, 웃음이 고팠던 걸까

'사내 맞선'의 이 같은 선전은 로맨틱 코미디로서 밀도가 높은 작품의 완성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성공한 원작 웹툰을 리메이크한 '사내 맞선'은 그래서 웹툰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연출로 뻔하고 상투적인 장면들을 과장되게 그려냄으로써 오히려 이것을 웃음의 포인트로 만들었다. 그래서 '사내 맞선'을 보다보면 순간 웹툰의 한 장면이 떠오르며, 마치 이 작품이 그것을 패러디 방식으로 끌고 와 웃음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클리셰 자체를 비틀어낸 연출의 힘이다.

여기에 말 그대로 '만찢남녀'(만화를 찢고 나온 남녀)처럼 보이는 캐스팅과 이들 배우의 연기도 한 몫을 했다. 안효섭이나 김세정은 물론이고 김민규와 설인아도 비주얼만으로 웹툰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물론 이건 잘 생긴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안효섭의 완벽한 듯 허술함을 드러내는 과장 연기나 김세정의 웹툰 한 장면 같은 리액션 연기가 더해져 만들어진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내 맞선'의 이런 놀라운 성취는 작품 외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최근 오미크론이 정점을 찍은 코로나 시국과 엄청난 갈등 양상을 보여준 대선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머리 아픈 현실들로 인해, 잠시라도 생각을 멈추고 즐겁게 한 시간을 보내고픈 대중들(글로벌 대중들을 포함해)의 욕망이 한 몫을 차지했다. 또한 지난해 내내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 등을 중심으로 등장했던 사회성 짙고 수위와 자극도 높은 장르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조금은 편안한 드라마에 대한 대중적 갈증도 커지고 있었던 상황이다. '사내 맞선'의 예기치 못한 반전 성공은 이러한 드라마 내외적 상황들이 맞물려 생겨난 현상에 가깝다.

드라마
드라마 '사내 맞선'의 한 장면. SBS 제공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가능성

'사내 맞선'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어 꾸준한 성과를 내는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의 가능성을 새삼스럽게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넷플릭스가 글로벌 성과를 냈던 '킹덤'부터 '오징어 게임',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의 작품들이 모두 판타지 장르물이었다는 점은 마치 한국드라마의 저력이 바로 이 장르물에 있는 것처럼 오인하게 만들지만 실제는 다르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신드롬급 열풍을 만드는 와중에도 동시에 인기를 끈 작품은 '갯마을 차차차'였다. 물론 여기에는 '오징어 게임'의 성공으로 인해 한국드라마가 추천 알고리즘으로 떠오르면서 미친 여파도 적지 않았지만, '갯마을 차차차'는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한류드라마의 명맥을 이어온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였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만든 작품이다. '겨울연가'부터 시작해 '미남이시네요', '별에서 온 그대', '사랑의 불시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K멜로로 불리는 한국 로맨틱 코미디에 대한 아시아권의 충성도 높은 팬 층이 존재하는데,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의 등장이 이 팬 층을 상당부분 흡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징어 게임'에 이어 '지옥'이 화제가 됐을 때도 '연모'가 넷플릭스 톱10에 올랐고, 그 후에도 '그 해 우리는'을 거쳐 현재 '스물다섯 스물하나', '사내 맞선', '기상청 사람들' 같은 작품들이 연달아 인기를 끌었다. 최근 급부상하는 한국의 판타지 장르물과 더불어 이른바 'K멜로'라 불리며 전통적으로 아시아권에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드라마
드라마 '사내 맞선'의 한 장면. SBS 제공

'사내 맞선'은 또한 최근 급증하는 웹툰 원작 드라마와의 선순환을 그린 작품으로도 의미가 있다. '사내 맞선'이 넷플릭스에 공개되고 관심을 받으면서 원작 웹툰 또한 비약적인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사내 맞선'은 드라마 방영을 기점으로 원작 웹툰이 국내에서 거래액 1위를 기록한 건 물론이고, 태국에서 10배, 인도네시아와 대만에서 13배 가량의 조회수 급등을 보였다고 한다. 또 카카오엔테테인먼트는 일본 픽코마(카카오재팬)에서도 작품 매출이 2배 가량 상승했고, 북미 타파스(카카오 북미 웹툰, 웹소설 플랫폼)에서도 3월 1주차 누적 매출 2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드라마와 원작 웹툰 간에 벌어진 성공의 시너지는 이미 '이태원 클라쓰'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2017년 '롯폰기 클라쓰'라는 제목으로 일본시장에 들어갔지만 별 관심이었던 원작 웹툰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2020년에 역주행 신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근 들어 중국이 한한령을 해제할 거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광전총국의 심의를 통과해 이달 초 중화권 OTT인 아이치이에서 첫 방영됐고, '슬기로운 감빵생활', '또 오해영', '인현왕후의 남자' 같은 작품들도 방송됐다. 물론 다양한 장르가 들어가 있지만 중화권을 포함한 아시아에서 역시 한국드라마가 강세를 보이는 건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다. '사내 맞선' 같은 로맨틱 코미디에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드라마
드라마 '사내 맞선'의 한 장면. SBS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