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정장…정돈되지 않은 모습 보이면 안돼요"
이인성 전 등 30년간 300여 회 기획
다양한 관람객 백화점 갤러리 특성 폭 넓은 장르 공부해 전문성 키워
“백화점 갤러리, 작품 니즈 다양 폭넓은 경험이 감동 줄 수 있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전시된 미술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은 일이 있는지. 작품 앞에 서기 전,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에 압도된 적이 있는지.
큐레이터는 관객들에게 이러한 느낌이 와닿도록 하는 전시장 연출가다. 조명, 작품 설명 텍스트의 위치와 크기, 동선 등 수없이 많은 요소들을 컨트롤해 공간을 연출하고 작품을 돋보이도록 한다.
대구는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미술 시장이 가장 활발한 지역. 그만큼 전시장도 많고, 전시를 기획하는 이들도 다수 활동하고 있다. 대구경북지역의 큐레이터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본다.
대구 중구 대백프라자 12층 갤러리 옆 사무실에 들어서면 방대한 양의 책과 스크랩 자료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책장에 빼곡히 꽂힌 그것들은 개관 50주년을 넘은 대백갤러리의 역사이자, 지역 미술계의 역사다.
김태곤 대백프라자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는 이곳에서 일한지 올해로 30년째다. 이쾌대 회고전, 이인성 특별전, 남관 특별전, 청전 이상범전, 피카소 세라믹전 등 굵직한 전시를 비롯해 총 300여 차례의 전시를 기획했다.
그는 "백화점 갤러리를 찾는 관람객은 어린이부터 미술전문가 뺨치는 이들까지 니즈가 다양하다. 그만큼 더 폭넓은 장르를 공부하고 전문성을 키워가야한다. 이곳 큐레이터 출신이라고 하면 외부에서도 인정해주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 처음 이 일에 뛰어들었던 계기는. 당시에는 큐레이터라는 직업 자체가 생소하지 않았나.
▶지금의 청년 미술가들도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1990년대에 서양화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컸다. 졸업하고 최소 3년은 그림을 계속 그려야 겨우 이름을 내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대백갤러리 큐레이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취직했지만 막상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동기들이 서울 현대백화점 갤러리, 호암미술관 등에 큐레이터로 취직했지만 대구에는 이제 막 상업화랑들이 생겨나는 수준이었다. 대학 선배가 큐레이터로 있는 봉성갤러리를 무작정 찾아갔다. 작가들을 직접 만나고 얘기를 들으며 현장의 분위기를 익혀갔다. 예술행정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영남대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에 진학했고, 전문성을 쌓아나갔다.
- 큐레이터는 우아한 겉모습과 달리 격무가 많은 3D 직종으로 꼽힌다. 현장에서 느끼는 바는.
▶흔히 우아하게 물 위에 떠있는 백조의 발놀림으로 설명하지 않나. 전시는 수없는 시행착오와 철저한 준비 끝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항상 정장 입은 깔끔한 모습을 보고 '험한 일은 안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시 오픈 전까지의 정돈되지않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큐레이터의 불문율이다. 겉모습만 보고 뛰어들었다가 현장에서 부딪혀본 뒤 못견디고 그만두는 이들도 많다.
보다 나은 연출을 위해 공간을 수차례 다시 구성하며 밤을 새는 체력적인 업무강도도 높지만, 좋은 전시를 위해 교과서적인 이론 외의 경험을 쌓는 노력들도 수반돼야한다. 예를 들어 도자기 작가 초대전시를 기획하는 경우 도자기를 빚는 방법, 작가만의 기법, 가마의 온도 등 작업의 전반적인 과정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필수다. 직접 작가가 돼보는 수준에 이르러야 작가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들이 곧 전시장을 찾아 작품을 보는 이들에 대한 예의인 셈이다.
- 그럼에도 큐레이터는 수년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355개 직업 재직자를 대상으로 한 직무 만족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원하는 작가를 섭외하고 공간을 구성한 뒤, 기대 이상으로 관객들의 반응과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냈을 때 성취감이 상당하다. 내가 생각한대로 해내고 꿈을 이루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 그간 지역 미술사에 대한 학술적 연구, 미술 평론, 문화콘텐츠 발굴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해왔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의 확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기업 내 갤러리다보니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오래 일하다보니 가진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여유가 조금씩 생겼던 것 같다. 지역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지역 기업의 역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박명조, 서동진, 이인성 등 대구 근대미술가들의 행적을 찾아다니며 '대구 신택리지' 책을 만들고, 지금은 사라진 대구예술 태동의 공간을 발굴하는 활동을 한 것도 그 이유다. 그렇게 찾은 흔적들이 모여 대구의 관광상품이 되고, 시민들이 예술을 향유하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1990년대, 대구 근대화가인 이쾌대, 이인성에 대해 대구시가 왜 조명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들었다. 마침 TBC 개국 기념과 맞물려 전시 의뢰가 들어왔고, 지역에서 이쾌대 전시를 직접 기획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수소문한 끝에 경기도 수원에 사는 유족을 찾아갔다. 미술품 보험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라, 유족들은 당연히 생면부지의 부탁을 거절했다. 하나라도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겠다, 믿어달라며 하루종일 설득해 자정이 다돼서야 계약서에 싸인을 얻었다. 고속버스 대합실에서 쪽잠을 자고 첫 차 타고 대구로 내려와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후 지역에서 이쾌대 전시가 열린 적은 있지만 일부 작품만이 내려왔을 뿐, 이쾌대 전작 대부분이 걸린 전시는 그때가 유일하다.
- 1971년 개관한 대백갤러리는 지역 미술계의 산 역사로 여겨진다. 자부심이 상당할 듯하다.
▶당시는 대백 본점 4층에 200㎡ 남짓한 규모로 갤러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하 1층의 커피숍은 미협 회원들이 모여 소통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지역 미술이 태동하던 때부터 주요 거점으로 자리매김해 온 역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지역에서 발간된 잡지, 학술지 등도 다수 보유하고 있어 여러 아카이빙에 도움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 내가 맡은 일 또한 역사가 된다는 생각으로 업무에 임한다. 개인적인 활동이 곧 기업이 가지는 사회적 역할, 나아가 대구의 정체성이 된다는 생각이다. 대구가 문화도시로 발돋움한 데에도 대백갤러리가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대구에서 뛰어난 작가들이 많이 배출됐음에도 한국미술사에서 재조명되지 않은 인물이 아직도 많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사라져가는 인물과 장소를 발굴하고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같이 논의할 수 있는 평론가들도 나이가 들고 힘이 떨어지고 있어 아쉽다.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은 대구 미술사를 정리해나가는 작업을 계속 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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