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백(百)의 그림자

입력 2022-02-18 18:30:00 수정 2022-02-19 08:30:13

황정은 지음/ 창비 펴냄

대구의 한 대학에서 열린 학위수여식에서 학사모를 던지는 졸업생의 모습이 그림자로 나타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28만4천명이던 대졸 실업자는 10년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했다. 매일신문 DB
대구의 한 대학에서 열린 학위수여식에서 학사모를 던지는 졸업생의 모습이 그림자로 나타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28만4천명이던 대졸 실업자는 10년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했다. 매일신문 DB
황정은 지음 / 창비 펴냄
황정은 지음 / 창비 펴냄

황정은 작가의 소설 '백(百)의 그림자'는 2010년 민음사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그해 작가에게 한국일보문학상을 안긴 작품이다. 올해 창비가 복간했다.

소설은 철거에 들어간 도심 한복판의 40년 된 전자상가가 배경이다. 가나다라마동으로 이어져있는 건물들 속 어딘가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작가는 20대 초반 세운상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오디오 수리를 하고 계셨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이 적잖이 작품에 실렸다.

소설의 키워드 중 하나는 '그림자'다. 감당 못할 고통이 생길 때면 그림자가 분리된다. 존재를 억압하는 내면의 상황이 상징처럼 구현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개별적인 환상이 아니라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보편성이 증폭된다. 빚을 진 난로상의 그림자가 솟아나고, 기러기아빠의 그림자는 아파트 13층 창문을 오른다.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은 여성의 그림자는 만사가 무기력하다.

저마다 다른 크기와 모양의 백(百)가지 그림자를 서로가 알아본다. 누구에게나 생기는 그림자인 것이다. 2013년 발표된 윤이형의 단편소설 '쿤의 여행'에서도 비슷한 생물, 피로감처럼 등에 찰싹 붙어있는 질감이 있는 물질이 등장하는데 이와는 약간 다르다.

소설
소설 '백의 그림자'가 주된 배경으로 삼은 서울 종로의 세운상가. 출처=세운상가 홈페이지

소설의 다른 키워드는 짧게 흘러가듯 연결되고 작가의 말에서도 쓰였지만, 서로를 조심스레 다루는 대사다. 무재와 은교 두 주인공의 대사가 상당량을 차지하는 소설에선 이들의 호흡마저 잘 전달된다는 게 특징이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철거를 앞둔 상가는 조금씩 허물어진다. 상가에도 그림자가 생긴다. 슬럼이라 불리고 패배의 음영이 진하게 풍겨온다. 우울하게 만들어 종국에는 스스로를 내던지게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주인공 두 사람의 대화와 삶의 자세는 그런 것과 결이 다르다. 그저 있는 대로 인정하고,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

요즘의 분류법으로는 '썸'인지 '오늘부터 1일'이 개시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서로에게 존칭 의존명사 '씨'를 붙인다. 이만큼 조심스러운 연인 사이의 대화를 보기도 어렵다. 한 문학평론가는 무재와 은교 두 사람의 대화체를 '가난한 언어'라 평하기도 했다.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왕버드나무가 녹음을 자랑하는 반곡지를 찾은 연인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왕버드나무가 녹음을 자랑하는 반곡지를 찾은 연인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애욕이 불꽃처럼 터져 나오는 흔하디흔한 욕정이란 찾아볼 수 없다. '애정행각'이라 불렀다간 불경죄로 다스려질 판이다. 행간 사이에 채워진 애정어린 분위기를 독자는 읽어낸다. 이들의 대화는 2018년 발표된 박상영 작가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주인공 커플의 대화와도 닮은 듯하다. 하나는 진지하고 하나는 코믹하다는 게 결정적 차이지만.

"당신이 맛보고 있는 건 우럭, 그러나 그것은 비단 우럭의 맛이 아닙니다. 혀끝에 감도는 건 우주의 맛이기도 해요… 우리 자신도 우주의 일부잖아요. 그러니까 우주가 우주를 맛보는 과정인 거죠…(웃기는 대목이지만 과감히 중략)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저도 좋아해요. 꽁치 맛있죠./ 꽁치 말고. 당신이라는 우주를요." ('우럭 한점, 우주의 맛' 일부)

192쪽, 1만5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