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술도시의 조건

입력 2022-02-21 10:20:49 수정 2022-02-21 16:13:26

최은주 대구미술관장

최은주 대구미술관장
최은주 대구미술관장

지난 30여 년간 세계 곳곳 미술관이 유명한 도시를 많이 다녔다. 비엔나, 암스테르담, 파리, 베를린 등 미술 문화, 좀 더 구체적으로는 미술관을 통해 도시의 성격을 형성해 가고 있는 곳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중 미술도시가 가진 매력, 또는 이를 만들고자 노력했던 인물의 집념이 두드러지는 도시가 있다. 바로 스위스 바젤이다. 바젤은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가 열리는 곳으로 페어 기간 중 전 세계 수많은 컬렉터가 모여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한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의 국경이 맞닿아 있으나 바젤은 스위스에서도 아주 작은 도시다. 국제적인 아트페어가 열리는 곳이지만 뜻밖에도 제약, 화학, 금융이 도시의 대표적인 산업인 이곳에서 어떻게 미술 문화가 풍요롭게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 더 나아가 명실상부 세계 현대미술계의 가장 중심적인 도시가 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다 보면 항상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에른스트 바이엘러(Ernst Beyeler·1921~2010)다.

'미술도시' 바젤의 도시 브랜딩에 있어 마중물 역할을 한 그는 화랑 운영자, 미술관 설립자, 기증자였고 바젤 아트페어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바젤 시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그의 미술 분야의 다양한 역할이 없었다면 지금의 바젤은 미술도시보다는 산업도시로서의 면모가 더 부각되었을지도 모른다.

연고 없던 대구에 정착한 지 3년, 이곳에서도 바젤 시민의 정신과 바이엘러와 같은 열정가들의 면모를 자주 마주하게 되면서 '미술도시 대구'를 그려보게 되었다. 대구는 근대미술의 메카다. 이상정, 이여성, 박명조, 서동진 등 우리나라 근대 화단의 선각자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근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인성, 이쾌대 등이 한국 화단을 개척했던 도시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구는 '공연예술의 도시' '음악을 기반으로 한 유네스코 창의도시'라고는 불리나, '미술도시'로서의 대중적인 공감대를 충분히 형성하진 못했다. 존재는 하나 원석으로 머물렀던 대구미술의 가치와 자산은 대구미술관 개관 10주년 전시 '때와 땅' '다티스트'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인성미술상' '모던 라이프' 등을 통해 전국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미술 관련자 위주로 공감했던 대구미술의 가치와 가능성을 일반 시민들과도 공유하기 시작해 '미술도시'에 성큼 다가서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으로 촉발된 이건희 미술관 유치운동 등도 대구가 가진 미술 자산을 보다 집중적, 효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기구, 미술관, 문화 역량을 집결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의가 좀 더 진전되고 대구가 가진 미술 역량을 집중시킨다면 미술도시의 조건을 확고히 가진 도시가 될 것이며 이를 도시 브랜딩에 잘 녹여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과정에는 많은 준비와 협상, 장애물이 예상되지만 목표를 향해 다 같이 고민하고, 역량을 모으는 원년이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