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편지함이 가득 찼습니다

입력 2022-01-07 10:30:00 수정 2022-01-07 18:51:44

김근향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

김근향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
김근향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

'받은 편지함 용량 초과로 메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스마트폰 저장 공간이 부족합니다' 등과 같은 메시지를 본 적이 있는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사용하고 저장하고 있길래 이런 언짢은 경고를 받게 되는 것일까.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 안에 쓰레기 더미가 오랜 기간 쌓여 있음(엄밀히 말해 쌓아 왔음)에도 이를 버리지 않아 악취 등의 고통을 겪은 이웃의 신고로 공권력까지 동원돼 쓰레기를 몇 톤씩 치웠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뉴스로 접하곤 한다.

저장이 이와 같이 병적 수준에 이르면 정신장애 즉, 수집광(蒐集狂) 또는 저장장애(hoarding Disorder) 진단이 가능하다. 그들은 물건을 사기도 하지만, 남이 버린 물건이나 전단지를 모으는 경우도 많다.

길어진 코로나19 시국에 배달시켜 먹을 때 보려고 모아둔 음식점 마그네틱이 혹시 냉장고 문을 뒤덮고 있지는 않은가. 한두 개일 때 소중했던 정보는 N개에 이르면 쓰레기가 되고 만다. 무엇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쓸모가 있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어딘가 쓸모의 기회가 언제가 될 것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은 왜 버리지 못하고, 왜 자꾸 모으는 것일까. 첫째, 그 물건에 의미와 가치를 과도하게 부여하고 심지어 강한 정서적 애착을 가지기 때문이다. 둘째, 그 물건을 버리면 중요한 정보를 혹시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셋째, 앞의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그 물건들이 없어진다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 상상만으로도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넷째, 뭔가를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이다. 대개 우유부단하고 꾸물거리며 회피적인 성격인 경우가 많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완벽주의인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용량 초과 경고 메시지는 내 디지털 공간(PC, 스마트폰 갤러리, 이메일 보관함 등)에 있는 뭔가를 내가 버리지 않고 쌓아 두었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의 PC와 이메일 보관함, 스마트폰 사진첩이 바로 그와 같은 모습일지 모른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강박적 성격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면 우리 모두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공간이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사람들은 일단 저장 용량을 늘리는 꽤 합리적으로 보이는 방편을 쓴다. 별도의 저장 장치를 사거나 여기저기에서 기념품으로 받아 두었던 USB(모아 두길 잘했다고 뿌듯해하며)를 이용해서 소위 백업을 한다.

더 큰 문제는 튼튼하고 안전하게만 보였던 저장 장치도 결국 물리적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몇 년에 한 번 꼭 필요해서 찾았을 때 그토록 애지중지 보관해 왔던 그 파일은 결국 읽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있곤 한다. 보관만 하다 결국 날려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가상공간에 디지털 자료를 무조건 저장하는 현대인의 이 첨단(?) 증상에 '디지털 저장장애'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새해를 맞아 나의 디지털 공간을 정리해 '디지털 저장장애'를 예방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분명 저장과 삭제라는 괴로운 선택의 갈림길에 설 것이다.

시원하게 삭제 버튼을 누르든 간직하고 싶은 편지로 별표를 해 두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이제는 저장과 삭제에 관한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고 이를 과감히 적용해 보자. 나는 일단 이렇게 하려고 한다. 일부는 내 디지털 공간에 저장, 일부는 내 머릿속에 저장, 일부는 '내 마음속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