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왕의 길] 새로운 신라를 연 문무대왕 1부

입력 2021-12-30 17:15:19 수정 2021-12-30 17: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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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사는 경주시(시장 주낙영)와 함께 '신라 왕의길 영상투어 - 새로운 신라를 연 문무대왕'을 총 2부로 제작, 매일신문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했다.

삼국 통일을 완수하고 통일국가 수성의 기반을 마련한 문무왕의 자취를 찾아 떠난 이번 영상 여행은 극작가 겸 배우 지안과 대구답사마당 이승호 원장이 함께 했다.

◆사천왕사지, 부처의 힘을 빌려 당나라를 물리치다

여행의 첫 출발지는 경주 낭산(狼山) 자락, 터만 남은 사천왕사이다. 사천왕사는 불력을 통해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문무왕의 염원을 담아 지어진 대표적 사찰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은 이뤘지만 한반도 지배를 노리던 당나라는 큰 골칫거리였다. 670년 당나라의 대규모 신라 침공 계획을 전해들은 문무왕은 명랑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명랑법사는 용궁에서 배워온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활용해 큰 바람과 거센 물결을 일으켜 당나라 50만 군사를 태운 배를 모두 침몰시켰다. 이듬해인 671년에도 명랑의 문두루비법은 신라로 쳐들어오던 당나라 군사들을 서해에 수장시켰고, 신라는 전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명랑법사는 낭산 자락에 여러 가지 색 비단으로 절을 짓고 오방신상을 만들어 세울 것을 제안했다. 이후 문무왕 19년(679)에 이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고 했다는 것이 『삼국유사』가 전하는 사천왕사 건립 배경이다.

신라인들은 본래 지은 사천왕사를 당나라 사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황제의 안녕과 수복을 빈다는 거짓 명목을 만들어 그 옆에 새 절(망덕사)을 지었다. 또 사신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사천왕사의 존재를 비밀에 부쳤는데, 이처럼 호국불교의 상징물을 지키려 한 신라인들의 노력과 의지가 사천왕사 터와 망덕사 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의지의 중심엔 문무왕이 있었다.

문무왕을 추념하는 비석도 사천왕사에 세워졌다. 현재 사천왕사지 입구 풀숲엔 머리가 잘려나간 귀부 2개가 남아 있다. 최근까지 이 인근에서 출토된 비편은 2종류로, 문무대왕릉비와 사천왕사사적비로 밝혀졌다. 머리가 잘린 2개의 귀부는 이들 비석을 받쳤던 것들이다. 출토된 비편은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각각 소장하고 있다.

◆미래를 위한 준비, '동궁과 월지'

문무대왕의 업적이 남아있는 또다른 명소는 요즘 SNS 야경 맛집으로 유명한 '동궁과 월지'이다.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유적이다. 하지만 안압지는 사실 신라 때 명칭이 아니라,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674년(문무왕 14)에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연못이 바로 월지다. 또 679년(문무왕 19) 그 바깥

에 동궁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며 외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연회장이자 놀이의 공간이었다.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전쟁 중에 월지를 만들고 통일 후 동궁을 조성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문무왕은 왕실 권위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월지와 동궁을 조성했을 것이다. 특히 문무왕에게 있어서 동궁을 짓는 것은 왕위계승을 위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문무왕은 신라 역사상 태자로 책봉돼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무열왕은 즉위 2년째 법민(문무왕)을 태자로 책봉했다. 문무왕도 즉위 5년이 되던 해에 신문왕을 태자로 책봉한다. 태자 책봉은 왕위계승 문제로 빚어질지 모를 우려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컸다. 왕이 갖춰야 할 자질과 능력을 미리 함양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태자궁인 동궁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신라의 동궁은 태자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태자의 교육기관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어찌됐건 동궁을 따로 세운 것은 왕위계승 준비를 위한 예비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문무왕이 순조롭게 왕위를 이어가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동궁과 월지'는 1975년 3월 경주고적발굴조사단 주도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2년여의 발굴조사 결과 전체 면적이 1만5천658㎡(4천738평)에 이르는 대형 연못과 그 안에 독립된 3개의 섬이 확인됐다. 못의 서쪽과 남쪽에서는 대형 건물지를 비롯한 31곳의 건물터도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출토된 유물은 3만3천여 점에 달했다. 이 가운데 1만5천여 점이 완전한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유물 일부는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발굴 당시 화제를 모았던 목선도 보존처리를 마치고 월지관에 전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