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입력 2021-12-24 18:30:00 수정 2021-12-25 06:33:52

임솔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청도 운문면 천년고찰 운문사 솔바람길. 매일신문 DB
청도 운문면 천년고찰 운문사 솔바람길. 매일신문 DB
임솔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임솔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임솔아 작가가 두 번째 소설집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를 펴냈다. 표제작을 포함,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렸다. 2020년부터 올해까지 발표된 작품들이다. 폭발적인 저작 속도임에도 하나같이 명작이다.

제10회 문지문학상, 제35회 신동엽문학상을 받았다. 소설도 잘 쓰고, 시도 잘 쓰는 작가다. 둘 다 능숙한 이의 작품이라면 꼭꼭 씹어 읽어야겠구나, 각오하고 읽기 마련인데 이 소설집은 각오가 무색해진다. 죽 먹듯 넘긴다.

소설로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니 신문 기사나 진배없다.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기사가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진화하면 이런 모양이겠구나 상상해본다. 대체로 관찰자 시점으로 쓰인 점도 그런 상상에 무게를 싣는다. 작품 속 등장인물 모두에게 실명을 부여한 점도 그렇다. 한 발짝 거리를 두고, 객관성을 유지하며 표현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아홉 편의 단편 중 맨 앞에 실린 작품 '그만두는 사람들'부터 묵직한 맥이 잡힌다. 작가는 배제되는 사람들을 그렸다. 정상의 범주에 있는 듯한데 고의로 외면받는 이들이다. 진실을 말하고 불편해진 경험이다.

작품의 주인공, 소설가로 보이는 '나'는 여러 사람과 메일로 소통하는 이다.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전한다. 2년 전쯤 동료가 겪은 일이 적힌다.

"동료가 문학계 권력 남용 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한 포럼에 패널로 초청을 받았는데, 보여지기식 포럼에 반발해 (문학계 권력 남용 문제의) 있는 그대로를 발제문으로 작성했다. 이후 해리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가 됐다. 아무도 동료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단편
단편 '그만두는 사람들'의 소재가 된 강지윤 작가의 전시회 '얼음의 언저리를 걷는 연습' 포스터

주인공 '나'와 메일을 주고 받는 사이인 혜리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스웨덴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유학중이던 혜리가 강의시간에 겪은 황당한 일이다. 교수는 혜리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한다. "한국인들은 그릇에 머리를 박고서 밥은 먹는다. 개처럼"이라고.

이 일을 스웨덴 친구들에게 말한 뒤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다. 함께 분노하길 바랐던 마음과 거리가 먼 질문이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왜 밥상에 머리를 박고 밥을 먹는 거지?"라고.

혜리는 그 질문에 인종차별이 전제되어 있다고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리고 시작된 거리두기. 그때부터 친구들은 혜리를 사무적으로 대하면서 지나치게 예의를 갖춘다. '불편한 관계'로 전환되는 수순이 보인다.

이를테면 "혜리가 엉뚱한 좌석의 공연 티켓을 끊어 왔는데, 그 사실을 혜리에게 말해도 될까" 혹은 "이 카페는 시나몬롤이 유난히 맛이 좋은데 혜리에게 그걸 시키자고 제안해도 될까" 등의 물음이었다. 지극한 상식을 주장하는 '휘슬블로어'가 외톨이가 되는 과정과 닮은꼴이었다.

따돌림. 게티이미지뱅크
따돌림. 게티이미지뱅크

단편 '초파리 돌보기'도 사회면 기사의 스토리 형태다. 산업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된 경력단절 여성의 가슴 시린 취업 분투기다. 지난달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 많이 알려졌던 故 이순자 씨의 '실버 취준생 분투기'(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가 겹친다. 청소부, 요양보호사, 어린이집 보조교사 등을 했던 이순자 씨의 생생했던 기록은 단편 '초파리 돌보기' 속 50대 무경력 주부 이원영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일을 하고 싶다면 산업재해 위험은 따질 겨를이 없다는 현실을 비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은 또 있다. 단편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를 펼쳐보면 우리 부동산 시장의 현주소가 보인다. 한 몸 뉘일 작은 집에 전력을 쏟아도 미래가 막막한 2030세대의 삶이 묘파돼 있다. 작가는 제도적 맹점도 조목조목 짚는다.

"2019년 특별공급 당첨자 중에서 부정 청약은 밝혀진 것만 10%에 달했다. 사람들은 청약당첨자가 되기 위해 싱글 맘과 위장 결혼을 했고, 임신을 한 후 낙태를 했으며, 파양할 아이를 입양했다"라든가,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면서 비혼으로 살아간다면, 50세가 될 때까지 무주택자로 살아가야 아파트 청약에 당첨 가능성이 생겼다", "특별공급에 장애인 항목이 있었다. 장애인 특별공급 대상자에게는 청약 통장도 필요가 없었다"는 문장에 이르면 정부 관계자들이 돌려 읽어야할 작품이란 게 명확해진다.

왜 결혼하지 않는지, 아이를 낳지 않는지 묻지 말고 고개를 들어 이 작품을 보라. 블랙코미디 한 편은 작품 후반부에 한 번 더 나온다.

"장애인 등록증을 발급받으려고요. 진단서를 받고 싶어 왔어요."

의사는 내 발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건 안 되는데요."

"왜요?"

"인정이 안 돼요."

"장애가 아닌 건가요?"

"손가락은 한쪽 엄지만 없어도 장애인 등록이 되는데요. 발가락은 열 개 모두 없어야 인정이 됩니다."

"왜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봅니까."

내 집 구하기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내 집 구하기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마지막으로 소설집의 재미난 부분 중 하나. 읽다 보면 기시감이 들어 앞 페이지를 뒤적이게 된다. 한 작품의 인물이 다른 작품에도 같은 이름으로 간혹 등장한다. 예를 들면 단편 '그만두는 사람들'의 혜리는 스웨덴에서 유학 중이며 단편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에서 다시 등장해 온라인 독서모임에 함께 한다.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피프티피플'이 얼핏 떠오른다. 284쪽, 1만4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