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연구자
버드나무 가지가 휘날리는데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고삐를 잡고 가는 인물과 백마를 그린 '견마도'이다. 말은 수그린 머리를 뒤로 돌렸고 네 발굽도 억지도 따라가는 듯 내키지 않는 모양새다. 선(線) 뿐인데도 말의 형태와 동작, 심사까지 전해진다. 인물의 옷차림이 중국 춘추시대에 준마를 잘 찾기로 유명했다는 구방고(九方皐)나 백락을 떠올리게 한다. 각각 빈모려황(牝牡驪黃), 백락일고(伯樂一顧)의 고사를 남겼다. 천리마를 찾아 왕궁으로 끌고 가는 그림인 듯 보인다.
천하의 말 중에서 명마를 골라내는 상마(相馬)는 곧 인재를 등용하는 일에 비유되었다. 당나라 한유는 '마설'(馬說)에서 백락이 있은 후에야 천리마가 있다고 하며 말이 없는 것인가, 말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한탄했다. 윤두서가 어떤 뜻을 이 장면에 담았는지 알기 어렵지만 덥수룩한 수염의 인물이 실감 나고 말의 모습은 더욱 생생하다. 윤두서의 말 그림은 당시에도 높은 찬사를 받았다. '언필'(彦筆)로 서명하고 호리병 인장 '언보'(彦父)를 찍었는데 모두 윤두서의 자(字)인 효언(孝彦)에서 나왔다.
윤두서는 말을 좋아하는 마벽(馬癖)이 있어서 항상 준마를 길렀다. 그가 말을 그린 방식에 대해 동시대의 미술이론가인 남태응(1687-1740)은 '청죽화사'(聽竹畵史)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마구간 앞에 서서 종일토록 주목하여 보기를 몇 시간이나 계속한 다음, 말의 모양과 의태(意態)를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 보아 털끝만큼도 비슷함에 의심이 없는 연후에야 붓을 들어 그렸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실물과 비교해 보고 터럭 하나라도 제대로 안 되었으면 즉시 찢어버리고, 반드시 실물과 그림이 서로 어울린 다음에야 붓을 놓았다."
벼루의 남은 먹에 내 뜻을 의탁하는 것이 문인화라고 여겼던 이전의 지식층과 다른 태도와 방법으로 윤두서는 그림에 임했다. 대상을 속속들이 파악할 때까지 오랫동안 관찰했고, 대상의 본질이 내 마음에 다 이해되어 의심이 없을 때까지 연구한 다음 붓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그린 다음에도 그림과 대상을 비교해 보아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다시 그렸다. 윤두서는 관찰과 사생을 반복적으로 심화시켰다.
윤두서와 윤덕희 부자에게 그림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심어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를 개발할 수 있게 한 바탕이 된 것은 국내외에서 사들인 수많은 책이었다. 아들 윤덕희는 윤두서의 일대기인 행장(行狀)에서 아버지는 책으로 공부한 내용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실행했기 때문에 배운 것이 모두 '실득'(實得)이 있었다고 했다. 윤두서의 말 그림은 독서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관찰의 사실(寫實)과 사색의 통찰로 실천한 인문학적 결과물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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