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지음/ 창비 펴냄
자식들을 다 키워 출가시킨 어머니들이 주로 그런다. 베란다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거나 화분 속 식물들의 잎을 닦는 게 신심어린 손짓이다. 일삼아 말도 건넨다. 화분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다. 출가외인처럼 살다가 오랜만에 집에 들른 자식들은 기함한다.
'자식인 나보다 더 아끼다니. 즐거워 보이긴 한데 얼마나 말동무가 없으면 저러시나, 많이 외로우신가보다'라는 착각이 '화분을 정리하고 해외여행이라도 보내드리자'라는 기발한 역발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단코 그래선 안될 일이다. 숱한 경험담이 존재한다. 식물도 답을 하는 경우가 있다.
식물이 주연을 맡은 천선란 작가의 장편소설 '나인'의 표지는 그림동화에 삽입된 듯한 그림 한편이다. 밤이다. 별이 하늘에 가득하다. 섬광이 단발머리 여자아이를 비춘다. 풀밭에 선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양장본에서는 그렇다.
'나인'은 작품 속 주인공의 유나인의 이름을 소설 제목으로 삼았다. 열일곱살 여고생이다. 오랜 기간 태권도장에서 수련했다. 유단자로 추정된다. 웬만한 남자에 완력으로 지지 않는다. 더 놀라운 게 있다. 식물들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이 있다.

나인과 함께 사는 이도 범상치 않다. 사람들이 죽은 땅이라며 기피하던 66㎡ 공간을 특이식물의 낙원으로 만든다. 각국에 퍼져 있는 156종의 희소식물을 판매한다. 절반은 흙이 필요 없는 에어 플랜트 식물이다. 특정 상황에서는 자체 발광도 한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진 않는다. 여하간 김초엽 작가의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에서 묘사된 것과 비슷한 식물이다.
'브로멜리아드'(이것 역시 열대식물의 이름에서 왔다)라 명명된 화원을 관리하는 이는 지모, 본명 '유지'다. 성이 유, 이름이 지인데 '지 이모'를 축약하다 보니 지모가 됐다. 전지적 작가시점 천선란 작가의 설명이다. 지모가 키운 식물은 누구에게 가더라도 죽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지모와 나인은 외계인이다. 그것도 식물이다. 외계식물이 아니다. 좀 많이 진화한, 인간과 닮은 식물이다. 인간과 닮은 만드라고라 뿌리가 얼핏 연상된다. 작가도 이들의 잉태 과정을 여러 뿌리의 합체로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누브족'이라 부른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왔다. 지구에 종족 일부가 살고 있다. 정기적으로 모여 지구에서 어떻게 살지, 지구 다음에는 어느 행성으로 떠날지 집단으로 궁리한다. 멸종중인 탓이었다. 소설은 주인공 나인이 이 사실을 뒤늦게, 열일곱에야 안다는 데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영상으로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평범한 인간으로 살다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외계인. 힘이 센데 마음만 먹으면 더 세질 수 있다. 지구 평화를 위해 그 힘을 쓴다. '슈퍼맨'이었던가. 클락 켄트, 신문기자로 살다 위기가 닥치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날아오르던 그였다. 공교롭게도 소설 '나인'의 에필로그에는 또 다른 외계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러 외계인이 지구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역시 기시감을 부른다. '맨인블랙'이다.
누브족은 지구에 머물며 땅과 식물에 의지한다. 땅과 식물에서 얻은 에너지를 몸속에 쟁여둔다. 자라다가 일정 나이가 지나 싹을 틔울 때가 오면 땅과 식물에 되돌려준다. 충전이자 상생이다. 나인이 산에 오를수록 기운을 얻은 건 피톤치드 효과 덕분만은 아니었다.

나무와 식물들의 말에 점점 귀가 열린다. 그런 와중에 나인은 금옥나무를 만난다. 일제 강점기 일본순사에게 쫓기다 객사한 소녀 금옥이가 나무에서 숨지면서 영혼이 깃든 나무였다. 금옥나무는 나인에게 중요한 단서를 알려준다. 고교생 한 명이 변사체로 인근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나인은 2년 전 발생한 학교 선배 박원우의 실종을 떠올린다. 경찰이 단순 가출로 처리한 사건이었다. 강한 심증이 나인의 진실 규명 의지를 부추긴다.
지금껏 식물성 누브족은 인간의 실책과 실정을 모른 척했다. 제아무리 파멸로 향해가더라도 알려주면 도리어 피곤해진다는 걸 선험적으로 깨친 터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그게 보인단 얘기냐",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거 아닌가"의 수순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누브족은 지구를 떠나면 됐다. 나인은 달랐다. 답답하게 사는 건 진짜 못 견디겠다며 나선다. 밑바닥부터 실마리를 찾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될까.
작가는 "뒤틀린 어른이 뒤틀린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가 자라 뒤틀린 어른이 되어 다시 뒤틀린 아이를 만드는 세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온전한 어른이 사라진 세상이 되기 전에, 상처와 슬픔이 무기가 되어 또 다른 출혈을 일으키는 세상으로 향하지 않도록 그런 마음으로 썼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인간의 사악한 기저 심리를 범행 동기로 엮는 끈이 팽팽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잘못된 것들이 바로 잡히길 바라는 작가의 선한 의도가 독자에게 전달되기까지 400쪽 남짓한 지면이 펼쳐져 있다. 428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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