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도시의 여백(餘白)

입력 2021-12-08 10:25:24 수정 2021-12-08 15:56:29

서남진 LH 대구경북지역본부장·도시및지역계획학 박사

서남진 LH 대구경북지역본부장
서남진 LH 대구경북지역본부장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직접 보고 싶은 충동에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다. 세한도를 접한 순간, 엄동설한의 들판에 홀로 서있는 듯 한기가 느껴졌다. 모진 풍파에도 기어이 버티고 서있는 송백(松柏)의 꼿꼿함도 느낄 수 있었다. 투박하고 단순하지만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보다 훨씬 훌륭해 보였다.

원인은 여백(餘白)에 있다. 동양화가 여백을 중요시하지만 세한도 만큼 여백이 중요한 그림이 있을까. 뭔가 조금이라도 여백을 더 채웠더라면 지금과 같은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비워져있는 만큼 사람의 마음을 채운 것이다.

도시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산과 하천, 공원, 녹지, 광장은 도시의 여백이라 할 수 있다. 빈 공간 없이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와 빌딩 숲으로만 지어진 도시는 아무리 편의시설이 훌륭하더라도 매력적인 도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일본의 모리기념재단 도시전략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도시의 국제경쟁력 지수(GPCI)에서도 도시녹지, 수자원 등 자연환경을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

뉴욕 맨해튼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한다. 하지만 330만 ㎡의 센트럴파크를 비롯한 곳곳의 크고 작은 공원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대도시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바쁜 일상과 팍팍한 삶에 찌든 뉴요커에게는 휴식과 재충전의 장소이며, 문화와 예술을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에게는 창의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분당 신도시는 1990년대 초에 건설돼 아파트를 비롯한 주거용 건물은 이미 노후화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높은 주택가격을 형성하는 요인 중 하나는 역시 비어 있는 공간(open space), 즉 여백이 많다는 것이다.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탄천 수변공간과 길고 넓게 뻗은 영장산 자락이 각각 도시의 서쪽과 동쪽의 녹지 축을 형성하며, 중앙공원을 비롯한 크고 작은 공원들이 계획적으로 곳곳에 산재돼 있다. 공공보행로와 도로 옆 넓은 완충녹지, 아파트 단지 내 녹지와 숲은 동서 녹지축과 시내 공원들을 실핏줄처럼 촘촘하게 연결한다. 집에서 나서는 순간 어디를 가든 자연을 만나고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도시의 여백이 도시를 짜임새있게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는 어떨까. 그야말로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다. 북쪽에는 팔공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남쪽에는 앞산과 비슬산이 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신천이 도시를 가로질러 남에서 북으로 흘러 금호강과 만난다.

금호강은 동에서 서로 굽이쳐 낙동강과 만나 남으로 흐른다. T자 형태의 수변공간 축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도심에서는 두류공원, 달성공원, 경상감영, 범어공원 등이 군데군데서 시민들의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숱한 개발압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건재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주변 산과 호수, 하천, 흩어진 공원과 녹지를 연결하고 최종적으로는 접근성을 높여 시민과 연결하는 일이 남아 있다.

도시 전체에 숲길, 바람길, 물길이 끊김 없이 이어져야 한다. 이 길을 따라 자연의 생명이 흐르고 도시의 활력이 생겨난다. 고령화와 저출생 영향으로 도시인구도 더 이상 늘어나기 힘들다. 도시외곽 개발의 수요가 줄어드는 것이다. 대구의 경우도 재개발이나 재건축, 주거환경개선 등의 방법으로 기존의 도시를 다시 고쳐(再生) 쓸 수밖에 없다.

이면도로 주변의 낙후된 주거지와 노후화된 공단의 환경을 개선할 때에도 새로운 여백의 조성과 연결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를 통해 도시 구석구석에 자연의 향기와 사람의 온기가 넘쳐야 한다. 비우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롭게 채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