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대가 없는 일

입력 2021-10-30 06:30:00

김혜지 지음 / 민음사 펴냄

영화 제작 현장 실루엣
영화 제작 현장 실루엣
김혜지 지음 / 민음사 펴냄
김혜지 지음 / 민음사 펴냄

201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혜지 작가가 첫 소설집 '대가 없는 일'을 묶어냈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꽃'을 비롯해 일곱 편을 실었다.

소설집의 제목 '대가 없는 일'은 소설집 맨 앞에 실린 단편 '언니'에서 왔다. 단편 '언니'는 2019년 1월 등단 직후 문예지(현대문학 4월호)에 선보인 작품이다.

여러 업체의 협찬을 일절 거절하는 인플루언서 언니의 말,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건 없어"에서 왔다. '대가 없는 일'이라는 제목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열쇳말이다. 인물들이 전부 '대가 없는 일'은 바라지도 않고 오히려 적절한 대가만을 바라는데도 그조차 쉽지 않은 현실이 바탕에 있다는 것이다.

소설집에서 가장 큰 분량으로 자리잡은 작품은 "그녀가 '오, 사랑'을 부를 때"다. 루시드폴이 부른 노래 '오, 사랑', 성시경도 불렀던 그 노래다. 긁는 듯 미끄러지는 기타음이 고막을 두드린다. 낭독하듯 들려주는 곡이다.

여기도 언니가 등장한다. '은주 언니'라는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아르바이트없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풍족하지 않다고 해서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건 아니라는 걸, 취향에 맞는 소소한 것들로 부지런히 곁을 채워가다 보면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만은 아니라는 걸 주인공 진희에게 가르쳐준 언니다. 그런 은주 언니는 '오, 사랑'을 잘 불렀다.

어디에서 실린 적이 없는 중편소설이다. 작품에 풍덩 빠져들어가 보니 얕지 않은 깊이다. 소설의 모습을 한 다큐멘터리다. 문학의 옷을 입은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 가까운, 여성 영화인 착취 기록이자 영웅 같던 언니에 대한 헌사다.

김혜지 소설집
김혜지 소설집 '대가 없는 일' 이미지 사진. 민음사 제공

작가는 소설을 빌려 "갓 서른을 넘긴 애송이 감독과 영화사 지하 골방에서 두 달간 쪽잠을 자며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고, 대사 몇 줄, 지문 몇 줄 고쳐놓고 영화사에 제출하는 시나리오 최종 원고 각색 타이틀에 제 이름을 끼워 넣던 40대 감독과 일하기도 했다"며 영화계의 폐습을 고발한다.

단 한 번도 제 날짜에 고료를 받지 못했던 것, 일한 시간으로 계산하면 편의점 시급도 안되는 돈인데도, 원고 마감일은 철석같이 지키게 하면서 입금일을 지키는 영화사는 없었다는 폭로도 뒤를 잇는다. 어디까지나 소설이지만 영화계 현실과 닮아 이게 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다.

흡사 '그것이 알고 싶다'같은 고발 프로그램에서나 보던 광경들이 이야기로 펼쳐지는데, 시나리오를 쓴 특이한 이력으로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입사했다 10년 후 퇴사한 주인공 진희의 이력이 작가의 지나온 삶과 너무도 닮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한 작가는 영화 '무방비도시', '인사동스캔들'을 각색한 이력도 있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나 히스토리 하나하나의 핍진감이 격하게 다가온다.

실제로 작가는 이 작품을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라고 했다. 작가의 말에서도 "쓰는 일은 종종, 내게 박혀 있던 말뚝을 기어이 뽑아 그 흉터를 들여다보는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김혜지 작가 등단작
김혜지 작가 등단작 '꽃' 일러스트. 전숙경

신문 사회면 기사를 하나씩 이야기로 풀어낸 듯 면밀하다. 기사가 말해주지 못한 것들이 소설로 입체화되는 과정이 읽힌다. 시사 이슈를 소설에 입히려는 시도는 그녀의 등단작 '꽃'에서도 보인다. 학교 폭력으로 고통받는 주인공은 내내 끌려다닌다. 힘없이 쓰러지고 망가진다. 작가는 피해를 제대로 호소하지도 못하는 가난과 무지의 대물림까지 담담하게, 단편영화 한 편을 담아내는 것처럼 묘파한다. 당시 신춘문예 당선작 심사평(심사위원 복거일, 전경린)은 이랬다.

"어느 사회에서나 나오고 결코 없앨 수 없는 이 심각한 문제를 정색하고 다룬 점을 심사위원들은 높이 평가했다… 문학 작품은 저널리즘과 다르다. 불의를 고발할 때도 문학적으로 해야 한다. 작가가 보인 건강한 정신으로 정진해서, 중요한 주제들을 진지하게 다루는 작가로 자라나기를 기대한다."

김혜지 소설집
김혜지 소설집 '대가 없는 일' 이미지 사진. 민음사 제공

작가는 그 당부를 수용한다. 미발표작 '아가야, 어서 오렴'에서 도드라지는 디테일로 발현된다. '아가야, 어서 오렴'은 4만5천 명의 회원을 가진 네이버 난임 카페명이다. 남들은 '한방에', '저절로', '어쩌다 보니' 되는 임신이 나는 왜 이렇게 어렵냐며 가슴을 치는 여자들이 모여 있다는 곳이다.

난임을 이겨내려는 주인공 현주는 때때로 자신이 임신하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때론 자신이 아이를 낳고 싶은 건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건지 헷갈린다. 난임이란 터널에 들어선 순간, 연약하고 비이성적이고 피해 의식에 찌든 다른 영혼이 몸을 잠식한 것만 같다. 병원에선 급격한 호르몬 변화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주의 모든 감정은 그렇게 일반화하기 곤란한 어떤 것이었다.

이 작품에도 사회적 이슈는 어김없이 담겨있다. '남녀고용 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명시된 연간 3일의 난임치료 휴가를 연간 30일로 확대하는 내용을 주 골자로 하는 법안 '아가야, 어서 오렴 4법'이 2020년 7월 발의돼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을 쓰는 일이 대가를 바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먼 길을 돌아 소설에 닿았으므로 감히 무언가를 더 바랄 수 없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작가는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에 대해 쓰는 일이 결코 대가 없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섞는다. 앞으로 독자와 만날 소설에서도. 276쪽. 1만3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