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붓 가는 대로', '누구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수필의 외연을 넓히는 말일 수는 있어도 막상 써보면 그렇지가 않다.
수필(隨筆)은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시작마제수필주(詩作馬蹄隨筆走)'에 처음 등장한다. 시심이 말의 발굽처럼 붓을 따라 달려야 한다는 시 창작을 설명하는 용어였다. 저작물로서의 수필은 남송시대 홍매(洪邁·1123~1202)의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비롯된다.
홍매는 남송시대 관리이자 독서광으로 용재(容齋)는 그의 호이다. 40여 년의 독서와 인간관계에서의 생각들을 집대성한 것이 '용재수필'이다. 속필, 삼필, 사필, 오필 등 5집 74권의 방대한 분량이다. ▷정치 ▷역사 ▷문학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다채로운 고증과 격조높은 문장이 탁월하다는 정평을 받고 있다.
이태준의 수필집이 '무서록'이듯 굳이 순서나 체계를 드러낼 필요가 없어 수필이라 하였다. 700년이 지난 후 용재수필의 애독자가 된 모택동은 전장을 누비면서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였으며 임종의 순간에도 찾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도제수필(陶濟隨筆) ▷독사수필(讀史隨筆) ▷한거수필(閒居隨筆) ▷병와수필(甁窩隨筆) ▷상헌수필(橡軒隨筆) ▷일신수필(馹迅隨筆) 등에서 비추어볼 때 선비나 문장가들에게 무한 제재와 자유로운 형식으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수필은 선망의 글쓰기 양식이었다. 그들의 내공이라면 '붓 가는 대로'는 보통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고 짜내어 다듬은 글보다 낫지 않았을까.
선인들은 '붓 가는 대로'에 약간의 치기와 겸양을 도모했다. 그럼 수필에 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신호(sign)적 인식이 아니다. '~인 줄 알았는데'보다 '살아보니'의 탈신호(de-sign)적 깨달음이다. 해학과 기지,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로 독자들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라 하겠다.
서구에서도 몽테뉴의 'les Essais'(1588)와 베이컨의 'The Essays'(1597)가 출간됨으로써 'Essay' 또한 책 이름에서 출발하였다.
오늘날 한국에서의 수필은 동양권의 수필이나 서구의 에세이와는 다소 결을 달리 한다. 상상과 창의적 사고를 기반으로 작가의 사적 주관을 객관화시키는 미적 창작물로 발전되어가고 있다. 한국의 고유한 문학 장르라 할 수 있다.
미디어의 발달로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이지만 '붓 가는 대로'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경지는 아니다. 우선은 일상의 작은 것에서 감동과 깨달음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수필가의 제 1조건을 갖추었다.
명배우가 관객에게 연기를 들키지 않듯, '붓 가는 대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이나 철학을 담아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향점은 '붓 가는 데로'이다.
장호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