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2017년 8월 공식 출범했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기치를 내건 소통 창구엔 하루 700개 안팎의 글이 오른다고 한다. 20만 명 이상 국민들이 추천한 청원엔 정부 및 청와대 관계자가 직접 답변을 제공한다. 무려 271만여 명이 추천을 누른 'n번방 용의자 신상 공개 요구'가 대표적이다.
국민청원은 이제 언론의 전통적 기능인 의제 설정, 공론화 장(場) 역할까지 맡고 있다. 국민으로서 억울하고 답답한 일, 사회에 필요한 주장 등을 호소하기가 용이하다. 일단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면 우리나라의 인터넷, 모바일 환경에서 파급력은 엄청나다. 삽시간에 여론이 형성되며 언론사의 입장에서는 주요 기사거리가 된다.
직접민주주의 보완과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국민청원의 순기능은 있다. 하지만 청원 모두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부각되지 않는다. 지난해 "25개월 딸이 성폭행당했다"며 53만 명의 동의를 얻은 아이 엄마의 글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장난처럼 쓴 글에 대한 책임은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혐의로 입건하는 수준에 그친다.
청원 내용에 도를 넘은 인신공격과 명예훼손, 입증할 수 없는 주장이 종종 있었지만, 다수의 대중은 실체적 진실을 살필 수 없기에 쓰여진 대로 분별없이 받아들이고 이를 확산시킨다. 언론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지난 5월 지역의 한 대학과 관련한 국민청원도 곱씹어 봐야 한다. 자신을 성폭력 피해자라고 밝힌 교수가 "대학이 강간을 덮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 연구센터 소속 동료 교수가 자신을 성폭행했고, 이를 센터장에게 보고했으나 묵살당했다는 내용이다.
실명까지 밝힌 청원인의 '호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여자로서 죽기보다 수치스러운 일을 공개한다"면서 "대학이 권력으로 사건을 덮으려는 처사를 (국민들이) 감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분노한 국민들은 이 청원을 퍼날랐고, 동의는 25만 명을 넘겼다. 시민단체들도 규탄에 가세했다. 전국 언론들은 취재 경쟁을 벌이며 기사를 쏟아냈다. 이에 대학 측은 센터장의 부총장직을 우선 면직 처리하는 한편 사건을 은폐·축소 없이 엄중히 조사하겠다는 입장문을 발표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경찰 조사 결과, 청원인이 2차 가해자라고 고소한 센터장은 무혐의로 밝혀졌고 성폭행했다는 동료 교수도 사건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청원인의 주장대로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와 참고인 진술이 없어 수사가 종결된 것이다. 물론 고소인이 새로운 증거를 제시한다면 재수사하겠지만, 사법기관은 국민청원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성폭행은 중대 형사사건이다. 피해자가 지난 2월에 가해자를 고소했고 이에 따른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인데, 국민청원을 올린 것은 수사에 영향력을 미치게 하려는 의도로 읽히는 대목이다. 제기한 사건이 올바르게 처리되지 않거나 진상 규명이 안될 때 청원을 하는 것이 상식적인 순서다. 해당 청원에는 그러한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
이번 국민청원은 가해자로 지목된 2명의 교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개교 74년 역사의 지역 대표 사학인 이 대학도 피해자다. 가뜩이나 어려운 지방대학의 처지에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져 신입생 모집이 걱정이라고 한다. 졸업생들은 모교에 대한 주변의 조롱 어린 시선으로 힘들다고 했다.
대중은 자극적인 현상에만 주목하지 사안의 결과에 대해선 관심이 멀어진다. 국민청원을 통한 일방의 주장은 언론 노출이 쉬워 여론 몰이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음을 보았다. 사연이 어떻든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어선 안 된다. 허위국민청원방지법 마련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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