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고장 난 녹음기 ‘80대 100’

입력 2021-07-13 05:00:00 수정 2021-07-13 06:10:12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 등이 지난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5차 재난지원금 보편 지급 현안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 등이 지난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5차 재난지원금 보편 지급 현안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해용 논설실장
김해용 논설실장

제5차 긴급재난지원금을 놓고 소득 하위 80%만 지급하자는 정부와 모든 국민에게 주자는 더불어민주당이 맞서고 있다. '80대 100' 도돌이표식 논쟁을 보니 마치 고장 난 녹음기 같다. 코로나19 팬데믹 장기화로 국민 피로감이 임계점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허구한 날 80%, 100% 논쟁하는 정부와 집권 여당의 모습이 한가로워 보인다.

정부가 소득 하위 80% 국민을 재난지원금 지원 커트라인으로 삼은 것은 팔레토 법칙에 기반한 발상인 듯 보인다. 상위 인구의 20%가 전체 부(富)의 80%를 차지한다는 저 유명한 법칙 말이다. 사실 재난지원금 보편 지원과 선별 지원 중에 딱 부러진 정답도 없다. 백날 논쟁해 봤자 더 좋은 답안을 도출할 수 없는 사안을 갖고 정부와 여당은 각자의 주판알을 튀기고 있다.

청와대 시점을 추론해 보자. 문재인 정권이 추구하는 사회적 정의는 가진 자들에게 세금을 왕창 거둬 기층민들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부(富)의 지나친 강제 배분 시도로 이 정권 출범 이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소득 상위 20%에게까지 재난지원금을, 그것도 1차 때에 이어 다시 배분하는 것을 문 정부는 태생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이번에는 민주당 시점이다. 정부의 전 국민 지원 불가론에 밀리기도 했지만 제5차 재난지원금 수혜에서 제외될 20% 국민들의 반발이 여간 꺼림직하지 않다. 내년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에서 한 표가 아쉬운 마당에 돈 뿌리고도 반발을 불러 표를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미련을 못 버리고 전 국민 재난지원금 카드를 계속 만지작거린다.

재난지원금의 지향점은 소비 진작과 국민 생계유지, 두 마리 토끼인데 문제는 여기에 은근슬쩍 포퓰리즘이 끼어든다는 점이다. 집권 여당의 한 유력 정치인은 "지역·소득에 관계없이 국민을 보호한다는 모습을 정부와 정치권이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과연 상위 20% 고소득층이 고작 25만 원을 받고서 정부로부터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보수 진영의 한 대권 주자는 지난해 1차 재난지원금 결정 때 "'국민의 돈'으로 '국민의 표'를 매수하는 악성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재정 부담이 큰 데 비해 소비 증대 효과가 미미하다는 사실이 실증된 점에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의 돈이니까 마구 선심 쓰는 것 아닌가. 집권 여당 실력자가 자기 재산의 80%, 아니 절반이라도 내놓으면서 재난지원금 보편 지급을 주장한다면야 그 진정성을 믿겠다.

하위 80% 선별 지원도, 보편 지원도 문제가 있다. 하나는 이념, 다른 하나는 포퓰리즘의 산물인 까닭이다. 게다가 코로나19 바이러스 방역에서 정부는 냉온탕을 오락가락했다. 재난지원금은 필연적으로 소비 장려 신호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적 모임 하지 말라고 해 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 진작을 위해 재난지원금을 뿌린다? 이런 이율배반도 없다.

끝내 수도권에서 4단계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됐다. 이 조치로 코로나19 확산세가 한풀 꺾일지, 성공을 못 거둬 사태가 장기화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정부가 록다운(lockdown)에 준하는 강제 명령을 내렸으니 그 피해를 상당 부분 보상해 줄 의무가 생겼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재정을 동원한 재난 지원은 보수적이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실행돼야 한다. 집합 제한 조치로 경제적 피해와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재난지원금이 집중되는 게 사회 정의에 부합한다. 제5차 긴급재난지원금 추경안, 다시 짜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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