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윤진모(수필가) 씨 母 고 김점옥 씨

입력 2021-07-11 13:51:45 수정 2021-07-11 18:41:57

넉넉하지 못한 살림 이불 홑청 구김살 펴듯 꾸려나가셨지요
양식이 부족할 때 김치와 콩나물로 국밥 만들어 주셨습니다

김점옥 씨와 가족들이 손자들의 생일잔치를 즐기고 있는 모습. 가족제공.
김점옥 씨와 가족들이 손자들의 생일잔치를 즐기고 있는 모습. 가족제공.

어머니, 가만히 불러 봐도 가슴이 뭉클거립니다. 위로 누님이고 막내가 여동생이며 가운데 여섯이 모두 아들로 저는 둘째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상처하여 이웃에 사는 열네 살 연하인 열여섯 살 어머니를 맞아들였지요. 어머니는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할 9남매의 막내였습니다. 외할머니께서 어디선가 본 사주팔자를 보고는 나이 많은 사람에게 재취로 들어가야만 고대 중국의 부자 '석 숭'이 부럽지 않게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믿고 따랐을까.

해방이 되던 그 해 가을에 전처소생의 여섯 살 된 딸과 세 살 아들의 '새어머니'가 되었지요.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를, 이불 홑청의 구김살을 펴듯 꾸려나갔습니다. 많은 식구의 입을 건사하기에 힘이 부쳐도 한마디 불평이 없었습니다. 양식이 부족할 땐 김치나 콩나물, 무를 넣은 국밥으로 뱃속을 채워 주었습니다. 자식들이 허기를 면하면 당신은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모르고 살았습니까.

어머니! 어머니는 빨래의 달인이었습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한스러움을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며 마음을 달랬을까. 온 가족의 빨랫감을 방망이로 두들기며 땟물을 빼고 마당에 널어놓으면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회 날처럼 옷들은 종일 그네를 탔지요. "애야! 단디- 잡으래이." 빨래를 다릴 때마다 어머니의 부름을 받으면 두말없이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저는 양손으로 가장자리 끝을 잡고, 어머니는 오른쪽 발로 한쪽 끝을 눌러 밟으며 왼손으로 다른 쪽을 잡은 후 오른손으로 다리미를 앞으로 밀었다 당겼다 반복했지요. 입 안에 머금은 물을 다림질감에 푸푸 뿜으면 무지개가 펼쳐졌습니다. 다리미가 지나간 자리엔 하얀 안개꽃이 피어나고, 주름이 쫙 펴지면서 보름달이 떴습니다.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1990년 음력 5월 5일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를 처음으로 업었습니다. 자식들을 거두느라 진이 다 빠져 그렇게 가벼웠습니까. 이듬해 7월 지산동 49평형 아파트로 옮겨오자 어머니는 '석 숭'이처럼 부자가 되었다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두 달 뒤 밤늦은 시간이었습니다. 풍을 맞아 누워계시던 아버지께서 뉴스를 보시다가 더듬더듬 저를 불렀습니다. 그때 어느 아주머니로부터 어머니가 돌아오셨느냐고 묻는 전화가 왔습니다. 비산동 한 회관에 불이 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TV에 계속 떴습니다.

어머니가 변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검게 그을려 쉬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긴가민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옆에서 쳐다보면서도 한참이나 살핀 뒤에야 가슴이 울컥 치밀었지요. 어머니의 얼굴이었습니다. 눈물은 등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더군요. 시뻘건 불꽃과 검은 연기 속에서 어머니는 숨을 멈춰버렸나 봐요. 한 시골 젊은이의 방화로 졸지에 16명의 사망자와 13명의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머니가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홀로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잠자리에 누워 있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얼굴을 덮은 천 아래로 두 손을 늘어뜨린 어머니의 손을 꽉 잡고 흔들어 봤습니다. 둥근 달이 붉은 구름에 싸여 서편으로 흘러갑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어머니의 입 언저리에서 맴돌았습니다. 어머니! 무슨 말을 그리도 하고 싶었습니까.

"어무이요, 인자 내려놓이소!" 꾹 닫혔던 제 입술이 열렸습니다. '인자 내려놓이소-' 메아리가 빈 하늘에 매달려 떨어질 줄 모르대요. 저는 잡았던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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