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조이섭 씨 부친 故 조병도 씨

입력 2021-04-08 13:53:31 수정 2021-04-08 18:58:31

남의 집 사과밭에서 일할 때 과수원 꿈꾸며 토지 장만하셨지요
쇠메·정으로 물난리에 대비해 돌담 쌓으신 혜안 놀라웠습니다

1975년 고향에 정착한 故 조병도(왼쪽 두번째 뒤) 씨와 조이섭(맨 오른쪽) 씨가 집에 놀러 온 조카들이 함께 찍은 기념 사진. 가족제공.
1975년 고향에 정착한 故 조병도(왼쪽 두번째 뒤) 씨와 조이섭(맨 오른쪽) 씨가 집에 놀러 온 조카들이 함께 찍은 기념 사진. 가족제공.

지난해는 장마가 유난을 떨었다. 때 늦은 가을 태풍까지 기승을 부렸다. 고향 강변에서 과수 농사를 짓는 사촌 형님 집에 인사차 들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헛간 구석에 서 눈에 익은 녹슨 쇠메가 보였다. 그 옛날 아버지께서 쓰시던 쇠메였다.

아버지는 소싯적, 남의 집 사과밭에서 일할 때 당신 과수원을 가져보겠다던 소망을 이루려고 고향에 토지를 장만했다. 농기구를 사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 고령 오일장에 갔던 날의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대장간에 들어서자, 우선 낫과 호미를 집어 들었다. 낫을 만지면서 허연 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두엄더미를 상상하고, 호미를 들고는 헛간에 수북이 쌓인 감자 무더기를 생각하는 듯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대장간 구석구석을 뒤진 끝에 쇠메를 들고나왔다. "아버지, 그건 어디에 쓰시게요?" "다 쓸데가 있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나무를 심고 밭을 일구느라 날 선 연장이 다 닳고, 새로 벼린 날이 또 닳고 모지라졌다. 아버지가 흘린 땀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한여름 땡볕에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마루에 앉아 새참으로 막걸리 한잔하는 아버지의 등판에서는 소금꽃이 하염없이 피고 졌다.

그러구러 과수원이 자리를 잡아갈 즈음 태풍이 닥쳤다. 그 무렵 나는 결혼해서 대구에 살림이 나 있었다. 시골집에는 전화도 없어 물난리 소식에 밤새 애를 태우다 새벽에 집에 들어서니, 아버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범람했던 강물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과수원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방바닥은 황토가 그대로 쌓여 있고 장롱이나 세간은 물을 머금은 채였다. 하지만 아직 어린 사과나무와 밭작물은 쓰러지거나 패이지 않고 거의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마을 이장이 피해 상황을 살피러 와서 우리 과수원이 가장 멀쩡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집의 피해가 유난히 적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처음 밭을 살 때부터 큰물이 질 수 있는 지형임을 알아보고 틈틈이 산으로 개울로 다니며 큰 돌을 주워 모았다. 쇠메와 정으로 돌을 쪼개고, 모난 것은 다듬었다. 손질한 돌은 모양과 크기에 맞추어 제자리를 찾아 고정했다.

둑을 넘어뜨린 물살이 과수원으로 밀려들어 오자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무릎 높이의 긴 돌담이 팔을 벌려 막아섰다. 돌담은 더러 무너지고 떠내려가면서도 성난 물길의 기세를 한 풀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물난리에 대비해 미리 돌담을 쌓으신 아버지의 혜안이 놀라웠다.

세월이 거짓말처럼 지나가 버린 지금, 빨간 녹을 뒤집어쓴 채 헛간에 기대선 쇠메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본다. 아버지께서는 묵묵히 일하면서 자식들이 스스로 보고 배우기를 바랄 뿐, 억지로 시키거나 목표를 정해두고 다그치지 않으셨다. 오로지 굳은살 박힌 손아귀를 호미 삼고, 당신 한 몸을 쟁기로 여기며 묵묵히 일하는 등을 보여주셨을 뿐이었다.

아버지처럼 돌담을 미리 쌓는 안목은 커녕 열 번 씨 뿌리면 한 번 거둘까 말까 한 내 깜냥으로 아이들에게 '더', '더' 하며 닦달했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머리가 허옇게 세었지만,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쇠메 질이 아침저녁으로 필요한 응석받이 막내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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