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깨물어 성폭행 저항" 부산지검 '정당방위' 부산지법 '계속 유죄'

입력 2021-02-18 21:12:15 수정 2021-02-19 00:33:24

1989년 대구고법에서도 정당방위 인정했지만…

성폭행, 성추행 범죄 관련 자료 이미지. 매일신문DB
성폭행, 성추행 범죄 관련 자료 이미지. 매일신문DB

성범죄를 저지르려던 남성이 입맞춤을 시도하자 한 여성은 혀를 깨물어 징역형을 선고 받았지만, 또 다른 여성은 혀를 깨문 것에 대해 정당방위를 인정 받았다.

징역형을 선고 받은 여성은 반세기 전 10대였던 여성, 정당방위를 인정 받은 여성은 현재 20대인 여성이다.

이게 같은 부산에 있는 부산지검과 부산지법에서 잇따라 판단돼 비교된다.

▶일단 오늘(18일) 부산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권기철)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70대 여성 A씨가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며 재심을 청구한 것에 대해 기각했다.

A씨는 1964년 5월 6일 18세였던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21세 남성에게 저항하다 그의 혀를 깨물어 1.5cm 절단한 혐의로 기소돼 부산지법(당시 재판장은 이근성 판사)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1995년 법원행정처 발간 '법원사'에도 기록됐다.

이후 전과자로 평생을 살아 온 A씨는 2018년 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여성단체에 문의해 도움을 얻어 지난해 5월 법원에 정당방위 인정을 요구하는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9개월만의 재판에서 재판부는 "청구인이 제시한 증거들은 무죄 등을 인정할 새로운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기각했다.

청구인(A씨) 측은 남성이 혀가 절단됐으나 말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상해진단서와 감정서 등을 토대로 언어능력에 장애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됐다. 또한 형법상 중상해죄 요건인 '불구'를 두고 신체 조직의 고유한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것만이 아니라 발음의 현저한 곤란도 불구로 볼 수 있고, 이에 형법상 중상해죄가 성립된다고 봤다.

정당방위라는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새로운 증거가 출현했을 때 논하는 것이지, 법률의 해석이나 적용의 오류가 발견됐을 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도 설명했다.

다만 재판부는 정당방위를 인정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재판부는 "정당방위에 관한 법리를 논할 때 언제나 등장하고 회자됐던 '혀 절단' 사건의 바로 그 사람이 반세기가 흐른 후 이렇게 자신의 사건을 바로 잡아달라고,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달라고, 성별 간 평등의 가치를 선언해 달라고 법정에 섰다"면서 "재판부 법관들은 청구인의 재심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으나, 청구인의 용기와 외침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커다란 울림과 영감을 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사실 법원이 닮은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사례가 앞서 나온 바 있다. A씨 사건으로부터 25년 후인 1989년 대구고법이 판단했다.

1988년 당시 33세였던 주부 B씨는 경북 영양군 한 골목에서 19세 남성 2명이 입맞춤을 시도하자 혀를 깨물어 저항했는데, B씨는 1심(대구지법 안동지원 형사합의부, 재판장은 이유주 부장판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방위 행위로서의 한계를 넘은 과잉방어"라는 판단이 나왔다. 선고 형량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

아울러 19세 남성 2명은 강간치상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강제추행 혐의만 인정돼 징역 단기 2년 6개월, 장기 3년을 각각 선고 받았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89년 2심(대구고법 형사부, 재판장은 변재승 부장판사)에서는 B씨의 정당방위를 인정,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B씨가 어두운 밤길을 혼자 가다 남자 2명에게 붙잡혀 폭행을 당하고 강제 키스를 당하면서 혀를 깨문 것은, 성적 순결과 신체 안전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판시했다.

즉, A씨에 대한 법원의 유죄 판결이 나온 1964년으로부터 20여년 뒤 비슷한 사건에 대해 이미 법원이 정당방위를 인정해줬고, 다시 30여년 뒤 A씨가 재심을 청구해 법원의 재판단을 요구했지만, 무산된 것이다.

▶다만 법원이 아니라 기소(재판에 넘김)를 맡은 검찰 차원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된 사례가 올해 나와 시선이 향한다. 법원까지 갈 필요도 없이 정당방위 판단이 나온 것이다.

지난해 7월 발생한 '황령산 혀 절단 사건'과 관련해 이 사건을 맡은 부산지검 동부지청이 판단했다.

강제 키스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30대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시킨 20대 여성에 대해 정당방위를 인정, 재판에 넘기지 않는 '불기소' 처분을 했고, 반대로 성추행을 시도한 남성에 대해서는 강간치상과 감금 혐의로 구속해 재판에 넘겼다.

황령산 혀 절단 사건은 지난해 7월 19일 30대 남성이 부산 서면에서 술에 취한 C씨에게 드라이브를 가자고 한 후, 차로 부산 황령산에 데려가 강제로 키스를 한 혐의를 받는 사건이다.

당시 C씨는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C씨가 상대 남성의 혀를 깨물면서 혀 3cm가 절단됐다.

사건 직후 맞고소 상황이 벌어져 시선이 모인 바 있다. 혀가 잘린 것을 두고 상대 남성이 C씨를 중상해 혐의로 고소했다. 50여년 전 A씨가 기소돼 유죄를 선고 받은 그 혐의이다.

이에 C씨도 강제추행 대응 과정에서의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상대 남성을 고소했다.

그러자 경찰은 두 사람이 함께 탔던 차량 블랙박스 및 동선상 CCTV를 통해 해당 남성의 강제추행 혐의를 확인했다. 이어 정당방위 심사위원회가 열려 C씨의 혀 절단 행위에 대해 "정당방위를 넘은 과잉방위이기는 하지만, 형법 21조 3항에 따라 면책된다"고 판단했다.

형법 21조3항에는 '방어행위가 정도를 초과한 경우라도, 그 행위가 야간에 발생했거나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공포, 경악, 흥분 당황으로 발생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이어 경찰로부터 사건을 넘겨 받은 검찰도 해당 의견을 수용한 것이다.

부산지검 동부지청은 C씨가 저항 과정에서 상대 남성의 혀를 깨문 것은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이는 33년 전 법원이 B씨의 유죄를 무죄로 뒤집으면서 밝힌 판시와 닮았다.

그러면서 성범죄에 저항하려 상대의 혀를 깨물었던 세 사람 가운데 A씨만 대한민국 판결 역사에서 억울한 국민으로 남고 말았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