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FOCUS] '슈퍼 마리오'가 이탈리아의 고질적인 정치 불안을 잠재울 것인가

입력 2021-02-20 12:00:00 수정 2021-02-20 12:14:41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리가 신임 총리가 17일(현지시간) 로마의 상원에서 치러진 새 내각 인준 투표가 끝날 무렵 회의장을 떠나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리가 신임 총리가 17일(현지시간) 로마의 상원에서 치러진 새 내각 인준 투표가 끝날 무렵 회의장을 떠나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지석 디지털 논설위원
김지석 디지털 논설위원

선진국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G7에서 말석을 차지하는 이탈리아는 다른 6개국과 구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G7은 세계 경제가 나아갈 방향과 각국 사이의 경제정책에 대한 협조 및 조정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주요 7개국의 모임으로,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캐나다·일본이 회원국이다.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G7답게 회원국 대부분은 정치가 안정돼 있는데 유독 이탈리아만은 고질적인 정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이탈리아는 최근에도 한 달간 내각이 와해 상태에 있다가 유럽중앙은행 총재(ECB) 출신 마리오 드라기를 총리로 내정하고 좌·우파 정당 대부분이 참여하는 사실상의 거국 내각을 구성해 정국 혼란을 수습했다. 정치 불안은 전임 주세페 콘테 총리가 이끌던 연립 내각에서 '생동하는 이탈리아'(IV)가 정책적 견해 차를 이유로 연정에서 이탈, 과반이 무너지며 초래됐다. 콘테 총리는 사임 카드를 던진 뒤 내각 구성권을 다시 쥐려는 승부수를 던졌으나 총리 임명권을 쥔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은 콘테 대신 드라기를 선택했다.

이탈리아는 1946년 공화국 수립 이래 75년간 무려 66개의 정부를 거쳤다. 정부당 평균 존속 기간은 13개월에 불과하다. 드라기 내각은 67번째 정부가 되지만, 벌써부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가 관심이 될 정도다. 콘테 전 총리만 하더라도 2018년 3월 총선에서 1∼2위를 차지한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M5S)과 극우 성향의 동맹(Lega)이 총리직을 다투다 타협의 산물로 총리직에 올랐던 인물이다. 피렌체대 법학교수 출신으로 정계와 인연이 거의 없던 그는 2019년 8월에 1차 연정이 붕괴되자 다시 새 연정을 구성해 2기 내각을 통솔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정치가 이처럼 불안한 것은 과도한 다당제 시스템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이탈리아 의회는 상원(321명·비선출직 종신 의원 6명 포함)과 하원(630명)으로 나뉘며 현재 상·하원 모두 10개가 훨씬 넘는 정당들로 구성돼 있다. 과거에도 비슷한 양상이어서 이탈리아 현대 정치사에서 과반을 점하는 강력한 정당은 나오지 못했으며 2개 혹은 3개 이상 정당이 연합해 정부를 구성하는 형태가 되풀이돼 왔다.

2, 3개 이상의 복수 정당이 연정을 구성하더라도 이념적 지향과 지지 기반, 정책 목표 등이 다른 상황에서 내분과 갈등이 일어나기 일쑤여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콘테 전 총리가 이끌었던 2개의 정부도 모두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탈리아의 정치 불안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최근 30년간 새로 취임한 이탈리아 총리는 13명으로 스페인·스웨덴(5명), 독일(3명)보다 월등히 많다. 정부 형태는 다르지만, 이웃 프랑스 역시 해당 기간에 재직한 대통령이 5명에 그친다.

이렇다 보니 이탈리아에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 토니 블레어, 독일의 헬무트 콜, 앙겔라 메르켈,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처럼 오래 재직하면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정치 지도자가 드물다. 예외적으로 1994년 5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4차에 걸려 9년 넘게 총리로 재직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있으나 그는 기행과 실언을 일삼고 경제를 망친 인물로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이탈리아의 정치 불안은 중·근세 역사를 살펴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대 로마제국의 찬란한 영광을 지녔던 시기에는 공화정과 제정이 이어지다가 중세 이후 수많은 도시·지역 국가로 쪼개졌다. 자연히 지역 간 경쟁과 갈등, 전쟁이 잦았다. 1861년에 뒤늦게 통일 국가가 됐으나 국가적인 가치 보다는 지역 고유의 문화와 전통, 자부심이 더 강한 특성을 지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들이 많이 출현했고 경제가 발달한 북부와 상대적으로 빈곤한 남부의 반목도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1990년대초를 기점으로 정치 불안 현상은 더 깊어졌다. 이전에는 중도 정당인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소수 정당이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횡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1990년대 초 구소련 붕괴와 함께 공산당이 몰락하고 기독교민주당도 1992년 시작된 대대적인 부정부패 수사인 '마니 풀리테'(Mani Pulite·깨끗한 손)의 직격탄을 맞아 와해돼 새로운 정치 질서가 수립됐다. 공산당은 여러 좌파 정당으로 쪼개졌고, 우파 쪽도 미디어계 거물이자 재벌 총수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전진이탈리아(FI)를 창당하는 등 변화의 물결에 휩싸였다.

연정 붕괴로 물러난 이탈리아의 주세페 콘테 전 총리가 2019년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만나는 모습. 연합뉴스
연정 붕괴로 물러난 이탈리아의 주세페 콘테 전 총리가 2019년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만나는 모습. 연합뉴스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우파연합의 수장 동맹은 원래 부유한 북부지역의 분리·독립을 기치로 내걸고 1981년 출범한 지역 정당 '롬바르디아 자치 동맹'을 모태로 한다. 가난한 남부지역 주민은 2018년 총선에서 기본 월 소득 보장과 연금 혜택 확대 등을 공약으로 내건 오성운동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이 두 정당은 지역별 투표 성향이 크게 엇갈리면서 제1당과 2당이 돼 연정을 구성했으나 지향점이 다르다보니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연정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없는 것도 문제다. 독일이나 스페인 등 유럽의 다른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연정 해체 시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이탈리아는 이러한 견제 장치가 없다. 이 때문에 연정에서 규모가 가장 작고 의회에서도 소수 정당에 불과한 '생동하는 이탈리아'(IV)가 이번에 연정을 무너뜨린 것처럼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 심심치않게 일어난다.

이탈리아를 새롭게 이끌게 된 마리오 드라기 신임 총리는 유럽중앙은행 총재 재직 시 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 등 남유럽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따른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 붕괴 위기를 극복해 '슈퍼 마리오'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타렐라 대통령이 콘테 전 총리보다 그를 선택한 것도 그의 훌륭한 이력을 더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용한 성격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드라기 총리는 20년 넘게 침체의 덫에 빠진 이탈리아 재건을 기치로 내걸었다. 국민적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지지율이 70%를 훌쩍 넘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드라기 총리는 마타렐라 대통령으로부터 내각 구성권을 받게 되자 거의 모든 주요 정당들을 연정에 참여시켰다. 그의 수완이 돋보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슈퍼 마리오'라는 이름값이 신뢰감과 기대감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원내 최대 정당인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M5S)부터 가장 진보적 성향을 가진 자유와 평등(LeU), 오랜 전통의 중도좌파 정당 민주당(PD), 중도를 표방한 생동하는 이탈리아(IV), 중도우파 전진이탈리아(FI), 극우 성향의 동맹(Lega)까지 다양한 색채의 정당들이 내각에 참여, '무지개 내각'으로 불리기도 한다. 상·하원 전체 의석의 9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내각으로 공화국 수립 이래 이탈리아 정치 역사상 처음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드라기 총리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일단 2018년 3월 총선을 통해 구성된 현 의회의 임기가 2023년 3월까지라 국정 운영에 임할 수 있는 기간은 2년 1개월 정도로 길지 않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들어선 상황이라 경제적으로 풀어갈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이탈리아 연정 특유의 불안정성도 언제든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의회의 폭넓은 지지가 국정 운영의 큰 동력으로 작용하겠지만 정치적 리스크도 그만큼 커질 수 있는 것이다.

드라기 총리로서는 정책적 지향점과 지지 기반이 다른 정당들을 조율하고 하나의 목표 아래 융화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은 전략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으며 차기에는 수권 정당이 되고자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게 돼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첫 시험대가 유럽연합(EU)이 회원국에 배분하는 코로나19 회복기금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탈리아는 전체 기금 7천500억 유로(약 1천6조원) 가운데 보조금·저리 대출 등의 형태로 회원국 중 가장 많은 2천90억 유로(약 280조원)를 받을 예정인데 기금의 우선적인 용도를 두고 정당들이 다툼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또한 드라기 내각 이면의 정치적 취약성에 주목하고 있다. 드라기 총리가 초반에는 대중적 인기와 신뢰를 바탕으로 무리 없이 정당들을 통제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감과 불만족이 표면화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 컨설턴트 기관인 '폴리시 소나르'(Policy Sonar)는 최근 공개한 보고서에서 "지금은 허니문 기간이며 이는 향후 몇 달 간 지속할 것"이라면서도 "어느 순간 순풍이 꺾이고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짚었다. '슈퍼 마리오'가 불안이 잠재된 정권을 어느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끌지 국제사회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