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임성근 판사가 사표를 수리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김명수 대법원장은 '탄핵' 운운하며 그 요구를 거절했다고 한다. 문제가 되자 그는 그런 발언을 한 적 없다고 잡아뗐다. 하지만 그의 발언을 담은 녹취록이 공개됐다. "여당에서 탄핵하자고 하는데 내가 사표를 수리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느냐, 사표를 수리하면 탄핵 얘기를 못 한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여당에서 총반격에 나섰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심부름센터도 하지 않는 '불법 도청'을 해 폭로했다는 게 정말 충격적"이란다. 그런데 본인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도청'이 아니며, 그것을 공개하는 것도 '불법'이 아니다. 같은 당 전재수 의원은 아예 "인성이나 인격도 탄핵감"이라며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상대 모르게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비열한 일이다. 하지만 임 판사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일을 하기로 했을 때에는 '인성'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게다. 즉, 그는 김 대법원장이 자신의 사표를 수리해 주지 않는 이유가 정치적 성격의 것임을 이미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녹음으로 그 증거를 확보해 둘 필요를 느낀 게다.
녹취록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탄핵이라는 제도 있지. 나도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탄핵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데." 이 대화를 나누던 작년 4월에는 '탄핵'이 현실성이 없었다. 결국 임 판사는 탄핵을 피하려고 사표를 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당시 그는 암 치료로 체중이 30㎏이 준 상태였다.
현 정권에서 세운 대법원장이 임 판사가 "탄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탄핵이 현실성도 없고 정당성도 없다고 믿으면서 대체 왜 그는 암 투병을 하는 판사의 사표를 수리해 주지 않은 걸까? 그 이유가 황당하다. "탄핵이라는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오늘 그냥 수리해 버리면 탄핵 얘기를 못 하잖아."
결국 임 판사를 여당 의원들이 탄핵 '얘기'를 할 '꺼리'로 남겨두려 한 것이다. 이 서비스의 대가로 그는 위험한 발언을 하고도 전재수 의원에게 외려 칭찬을 들었다. "오히려 징계하기 전에 사표를 내고 책임을 회피하는 공직사회의 오래된 관행을 대법원장이 막은 것으로 국회의 위상, 삼권분립을 굉장히 존중해 주는 발언이다."
김 대법원장은 거짓말을 했다. 자기가 한 발언에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규정에 따르면 당시 대법원장에게는 임 판사가 낸 사표의 수리를 거부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판사 출신 여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제 존재감을 만끽하도록 서비스해 줄 정치적 필요뿐.
김 대법원장은 임 판사가 탄핵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뭐라고 떠들든 그 소신에 따라 임 판사의 사표를 수리했어야 한다. 그리고 예상되는 의원들의 질타에는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며 당당히 제 소신을 밝혔어야 한다. 그것이 독립된 기관으로서 사법부의 수장이 할 일이다.
요즘 여당 의원들은 '선출된 권력'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삼권분립이란 그 잘난 '선출된 권력'으로부터 사법부의 자율성을 말한다. 법원이 선출된 권력인 행정부나 입법부의 입김에 놀아나는 것을 우리는 '사법 농단'이라 부른다. 결국 사법 농단을 단죄한답시고 또 다른 사법 농단을 벌였으니, 어처구니없는 역설이다.
지난 정권에서는 적어도 사법 농단이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이라도 했다. 그런데 이 정권의 특징은 제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다 "삼권분립을 굉장히 존중해 주는" 장한 일이었단다. 그렇게도 장한 일이라면 김 대법원장이 왜 거짓말을 했겠는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제 선행을 감추려고?
결국 같은 사법 농단이라도 지난 정권에서 하면 나쁜 농단이고 자기 정권에서 하면 착한 농단이라는 얘기다. 절망스러운 것은 이런 헛소리를 듣는 정신적 고통을 앞으로 3년은 더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절망감이 그저 나만의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나라 전체가 정신적 고문실로 변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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