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노년기에 접어 들었지만, 미국의 영화배우 실베스터 스탤론과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전성기 시절 인기는 세계를 휩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스탤론의 대표작 '람보'시리즈와 '록키' 시리즈, 슈왈츠제네거의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전 세계 영화광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작품들은 수작과 졸작이 뒤섞여 있었지만, 대중오락물로서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한 흥행몰이를 했다.
스탤론과 슈왈츠제네거가 한창 활동을 하던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영화와 음악 등 미국의 대중문화는 세계를 사로잡았다. '람보' 시리즈는 퇴역 군인 람보가 홀로 적들을 무찌르는 비현실적인 내용으로 1980년대 '강한 미국'을 외치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대의 폭력적인 패권주의를 반영했다는 해석을 낳았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SF 영화에 나타난 미래상을 당시로서는 독보적인 첨단 테크놀로지로 구현해 감탄을 자아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우리나라 영화관에는 다양한 미국 영화들이 끊임없이 상영됐다. '람보'와 '터미네이터 2'를 보기 위해 단관 영화관 앞에 긴 줄을 서야 했고 '사랑과 영혼', '가을의 전설' '나홀로 집에' 같은 영화들에도 관객이 미어터졌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꿈의 공장'이라 하는 할리우드가 빚어내는 미국 중산층의 풍요로운 생활, 짜릿한 액션, 좋은 편인 미국의 '정의'가 항상 승리하는 공식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극장을 나설 때에는 어김없이 초라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지금의 4050 이상 세대는 성장기에 미국 영화 뿐만 아니라 음악도 많이 들었다. 라이오넬 리치와 다이아나 로스, 브루스 스프링스틴, 특히 압도적인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들었고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 등의 음악도 사랑했다. 대부분이 한때는 할리우드 키드였고 빌보드 차트에 오른 음악을 듣는 등 미국 문화의 세례를 받고 성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이 최강이면서 대중문화의 힘도 압도적이다. 1990년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나이는 군사력과 경제력의 '하드파워'(hard power)와 함께 문화, 예술, 스포츠, 가치관과 같은 무형의 자산을 나타내는 '소프트파워'(soft power)의 개념을 제시했다. 나이 박사는 당시 중국의 부상을 경계하는 시각에 대해 중국의 국력이 성장하더라도 소프트파워가 미국에 미치지 못해 미국의 1인자 지위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지프 나이의 진단은 현재에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적절한 분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오랫동안 '슈퍼 파워' 국가였으며 그때문에 세계 각지에서 반미의 움직임을 불러오기도 했으나 여전히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가 가장 강력한 나라이다. 다만, 미국은 하드파워면에서 막강한 국가로 성장한 중국에 위협을 느끼는 상태가 되었으며 소프트파워에서도 절대적인 자리를 조금씩 내주고 있는데 두드러진 성장세로 한 자리를 차지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홍역을 앓은 지난해에 소프트파워의 성장에서 기념비적인 한 해를 보냈다. 영화 '기생충'이 비영어권 영화 최초로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4관왕에 오르며 세계 영화사를 새로 썼다. 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은 지난해 2회 연속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HOT)100 1위를 차지했고 한국어 가사로 첫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또 2018년 5월부터 5장의 발매 앨범이 연속 빌보드 핫200 1위에 오르며 팝의 새 역사를 썼다는 찬사를 받았다.
문화 분야 뿐만 아니라 스포츠 분야에서도 빛나는 성과를 이뤘다. 손흥민이 세계 축구의 중심인 유럽에서도 최정상 리그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 행진을 펼치며 유럽리그 150골 달성의 위업을 쌓았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류현진과 김광현, 미국 여자프로골프 투어의 고진영, 김세영, 박인비 등도 감탄을 자아내는 활약을 펼쳤다. 문화·스포츠 분야의 한국 스타들의 두드러진 성취는 코로나19로 지친 우리 국민들을 위로했고 외국 팬들에게도 기쁨을 줘 코로나19의 시름을 덜게 했다.

코로나19에 대한 효과적인 방역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음으로써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높였다. 한국은 봉쇄조치를 취한 다른 나라와 달리 대규모 검사 및 추적 전략으로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낮춰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3차 유행에 따른 확산으로 방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한국의 코로나19 방역 시스템은 드라이브인스루 검사 방식 등 혁신적인 모델을 국제사회에 제공하면서 모범이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영국의 모노클(Monocle) 이라는 잡지는 지난해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독일에 이어 2위라고 평가했다. 이 잡지는 2012년부터 매년 문화, 외교, 교육, 기업·혁신, 정부의 5개 차원에서 세계 각국의 소프트파워 순위를 발표해 왔는데 그동안 한국은 10~20위권으로 평가받았다. 모노클은 코로나19로 인해 기존 조사 방식 대신 여러 도전에 맞서 주목할만한 일을 해낸 10개국을 대상으로 했다며 한국이 대중문화와 혁신에서 국제적 표준을 세웠고, 코로나19 방역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점을 높게 평가했다.
대중문화와 스포츠, 이념과 가치관 등을 담은 소프트파워는 '매력'을 심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력적이다.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하드파워가 국가들 간의 외교와 국제질서를 정립하는 데에 작동한다면 소프트파워는 외국 일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써 국가 브랜드를 높이고 정부 채널 간 외교보다 때로는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베트남 축구에 일대 진보를 가져옴으로써 베트남 사람들이 박항서 감독의 조국인 한국에 큰 호감을 느끼게 된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는 과거에 미국 소프트파워의 매력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미국인들의 풍요로운 생활과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멋진 수사를 동경했으며 알게모르게 그들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매력을 전하는 나라가 됐다. 지난해의 빛나는 성취 이전에도 K팝이 오래 전부터 세계의 청소년들을 사로잡았고 영화와 드라마가 세계의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한류'의 매력은 음식과 언어 등으로도 확장돼 한국은 훌륭한 발효음식을 만드는 건강한 국가 라는 인식이 생겼고 한국 음악과 드라마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외국인들의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망도 더 커지게 만들었다. 외국의 미디어들은 한국의 영화와 음악, 스포츠 스타 등을 점점 더 많이 다루고 있고 이에 외국인들은 한국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과거에 외국인들이 한국을 더 잘 알기를 바라는 한국인들의 열망은 이제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나아가 코로나19의 효과적인 방역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이 선진적인 체계를 갖춘 국가라는 인식을 결정적으로 심어주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일 신년사에서 BTS, 블랙핑크, 손흥민, 류현진, 고진영 등 문화·스포츠 분야 인사들을 이례적으로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문 대통령은 "소프트파워에서도 선도국가로 도약할 것"이라며 "문화예술인이 마음껏 창의력과 끼를 발휘하도록 지원하고 한류 콘텐츠의 디지털화 촉진 등 문화강국의 위상을 다지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아세안과 인도 등을 대상으로 한 신남방정책을 언급할 때에도 K팝 등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 소프트파워의 성장은 디지털화한 세상에서 IT와 디지털 분야에 강점을 지닌 토대에 민간의 창의성이 어우러져 꽃을 피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정부가 마당을 까는 노력이 있었고 민간이 그 위에서 춤을 추고 날개를 폈다. 소프트파워가 더 강해질 수 있는 토양은 갖춰진만큼 앞으로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고 민간은 창의성을 계속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IT·디지털 분야의 변화와 발전이 빠른만큼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선도해 나가는 기민함도 필요하다. 소프트파워가 더 강해질수록 우리나라의 위상이 더 높아지고 국가적 안정도 더 튼튼해질 것이니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또 하나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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