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옆 카프카스 지역에 위치한 아르메니아는 최근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벌여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주요 지역을 넘겨주는 등 사실상 패배한 상태에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에서 기독교를 최초로 받아들인 유서 깊은 국가지만, 인구 300만 명 정도의 작은 나라로 인구가 세 배 많은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에서 역부족을 드러내며 굴복해야 했다.
아르메니아의 또다른 비애는 언어에 있다. 아르메니아어는 38자의 독특한 알파벳을 바탕으로 한 언어로 5세기부터 문헌이 전해 내려오며 인도유럽어족의 중요한 분파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지리적·역사적 이유 때문에 이란어(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예전에는 이란어의 방언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란어로부터 차용어가 매우 많아 기초어휘의 상당수가 잠식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언어의 위기는 그보다 우세한 언어를 만나서 차용어를 많이 쓰게 되거나 그로 말미암아 기초 어휘가 우세 언어의 그것에 밀릴 때 발생한다. 아르메니아어가 이란어를 많이 차용해서 고유의 기초 어휘들이 많이 사라질 상황에 처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지금은 거의 소멸된 만주어도 우세 언어인 중국어(한어:漢語)에 급격하게 밀려 소멸하는 과정을 겪었다. 만주어는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언어였으나 문화적으로 한족에게 동화된 만주족이 만주어 대신 중국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용했고 만주어는 결국 버림받고 말았다.
언어 소멸의 위기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거나 제대로 계승되지 않을 때, 계승되더라도 젊은 세대들이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일어난다. 일본 북부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아이누어는 약 300명의 원어민만 남아 있고, 불과 10여 명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젊은 세대들은 거의 배우지 않아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의 제주 방언은 표준어와는 별개의 언어라 할 정도로 차이가 심한데 제주도의 젊은 층이 미디어 등의 영향으로 표준어를 쓰고 제주어를 익히고 쓰려 하지 않아 심각한 소멸위기 상태에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지난 7일 외국어를 대체할 우리말을 선정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언어의 위기와 운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날 '오픈 런(open run)'을 대체할 쉬운 우리말로 '개장 질주'와 '상시 공연'이 선정됐고 '웰컴 키트(welcome kit)'의 쉬운 우리말은 '환영 꾸러미'로 정해졌다.
'오픈 런'은 매장이 열리기 전부터 기다리다가 개장하자마자 달려가 물건을 사는 현상을 이르는 말로 '개장 질주, 개점 질주'가 대체어가 됐다. 폐막 날짜를 정해 놓지 않고 무기한으로 상영·공연하는 것을 뜻할 때 쓰이는 '오픈 런'의 대체어로는 '상시 공연'을 선정했다. 반대로 폐막 날짜가 정해진 공연인 '리미티드 런'(limited run)의 대체어는 '기간 한정 공연'이다. '웰컴 키트'는 환영이나 응원의 뜻을 담아 제공하는 물품을 뜻하는 말로 '환영 꾸러미'가 대체어가 됐다.
이날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새롭게 오른 대체어는 1만8천84번째부터 1만8천87번째 순서에 해당하는 단어였다. 그만큼 우리가 일상에서 외국어, 그 중에서도 영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기술과 생활 양식이 도입되고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용어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이해된다. 그러나 대체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고급 용어나 전문 용어도 대체어를 찾을 수 있고 일상적인 용어도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많이 사용하는 세태가 만연한 것 또한 사실이다.
국립국어원 자료를 살펴보면 '엔(n)차 감염'은 '연쇄 감염', '연속 감염'으로 쓸 수 있고 '트윈 데믹'은 '감염병 동시 유행'이다. '그린 모빌리티'는 '친환경 이동수단' '친환경 교통수단'이고 '스카이워크'는 '하늘 산책로', '언박싱'은 '개봉', '뉴 노멀'은 '새 기준' '새 일상', '론칭'은 '사업 개시' '신규사업 개시'이다. 충분히 우리말로 쓸 수 있는데도 외국어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말보다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현상은 꽤 오래 지속돼 지금은 이를 되짚어볼 생각조차 않을 정도로 무감각해졌다고 할 수 있다. 신문이나 TV 등의 매체에서 이미 우리말보다 외국어를 많이 사용하며 중요한 공적인 행사에서조차 비중 있는 공직자들이 '그린 모빌리티', '뉴 노멀'이라는 단어를 흔하게 사용한다. 주민복지센터의 '센터'는 공기관의 명칭에 아무런 생각이나 거리낌 없이 영어를 차용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 열려 있고 외국과 교류가 잦은 시대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외국어 과잉과 남발이 너무 심하다. 우리말로 대체하는 단어를 쓰기에 어색하다고 하는 것부터가 그동안 우리가 너무 몰비판적이고 몰지각하게 언어 생활을 해온 건 아닌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름답고 독창적인 한글을 바탕으로 한 한국어가 쇠락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한글과 한국어는 한국인들만 사용하던 문자와 말에서 벗어나 요즘에는 '한류'에 힘입어 배우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국력과 문화의 번창에 발맞춰 우리말도 융성기에 접어드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말을 사랑하지 않으면 생명력도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을 서늘하게 되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말의 50% 이상은 중국어인 한자 차용어이고 15%가량은 외래어이며 순수 우리 고유말은 3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가람'이나 '뫼' 등의 우리말은 한자 차용어인 '강'이나 '산'에 밀려난지 오래됐다. 그런만큼 외국어를 전에 없이 많이 사용하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우리말을 더 애용하고 다듬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정부의 자성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 국립국어원이 외국어에 대해 우리말 대체어를 제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정도의 대응으로는 안 된다.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을 줄이고 더 적극적으로 우리말을 장려하고 애용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공공기관의 명칭이나 정책 등에 사용되는 외국어부터 우리말로 다듬어야 한다. 일반 대중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지는 신문과 방송 등의 매체 역시 우리말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하는 내부 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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