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연구자
이당 김은호는 초상화, 미인화로 유명하지만 여러 분야 그림을 다 잘 그렸고 도석화도 많이 남겼다.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신선과 부처의 가피를 약속하는 불승그림인 도석화는 널리 환영 받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포대화상도 달마도처럼 인기가 많았다. 항상 포대자루를 메고 다녀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요즘 절집에 가면 야외에 조각상으로 많이 놓여 있는데 커다란 자루에 기대앉은 유쾌한 얼굴로 풍선처럼 늘어진 배를 가리지도 않고 배꼽을 드러낸 배불뚝이 모습이다.
포대화상은 10세기 초 중국에 실존했던 승려 계차(契此)라고 한다. 일정한 주거 없이 떠돌아다니며 살았는데 무엇이든 주는 대로 시주받아 포대에 넣어두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항상 함박웃음을 띤 웃는 얼굴이어서 소불(笑佛)이라는 별명이 있다. 눕는 곳이 곧 침실이어서 아무데서나 코를 골며 자는 낙천적인 호인이었고 아이들이 배를 만지고 장난을 쳐도 그저 웃기만 했다고 한다.
거리에 살며 서민과, 아이들과 함께 했던 포대화상은 민간에서 사랑받아 중국에서는 재신(財神)으로, 일본에서는 칠복신(七福神)의 하나로 모셔진다. 그림으로 그려질 때 포대도는 선종화(禪宗畵)에 따라 몇 번의 붓질로 단숨에 그려진다. 달마도처럼. 그런데 김은호의 '포대화상'은 지팡이와 포대, 옷자락 등에 일필(一筆)의 단 붓질을 활용하면서도 잘 계산된 옷의 농담 표현이나 미묘한 채색의 피부 빛, 바닥의 풀 등은 그의 미인도처럼 섬세해 선종화의 감필법(減筆法)과 미인화의 일본화풍이 어울린 특이한 포대도가 되었다. 김은호다운 아름다운 포대화상이다.
김은호는 1915년 4년 만에 서화미술회 강습소 화과(畵科)를 졸업하고 선생님들의 권유로 3년을 더 서과(書科)에서 계속 공부해 글씨도 잘 썼다. '정묘(丁卯) 동절(冬節) 이당(以堂) 사(寫)'로 날짜와 서명을 했고, 머리도장은 '촌심천고(寸心千古)', 낙관 인장은 '김은호인(金殷鎬印)'과 '낙청헌(絡靑軒)'이다. 화제는 포대화상과 관련되는 게송과 문학 작품 가운데 남송 악가(岳珂)의 「포대화상송(布袋和尙頌)」을 인용했다.
행야포대(行也布袋) 걸으면서도 수행하는 포대화상
좌야포대(坐也布袋) 앉아 있을 때도 수행하는 포대화상
방하포대(放下布袋) 모든 것을 내려놓은 포대화상
하등자재(何等自在) 어찌 그리도 자유자재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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