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의 영국이야기] 영국은 아직도 계급이 있는 나라다.

입력 2020-10-12 15:35:00 수정 2020-10-12 18:05:19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영국은 계급이 있는 나라다. 타고난 계급이 사회 전반에 걸쳐 세세하게 녹아 있고, 삶 구석구석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부와 직업과는 별 관계가 없고 말, 행동, 취향, 생활 습관 등과 관련이 있다. 생활 곳곳에서 온갖 세밀한 형태로 드러나지만, 간접적이고 은근해서 외국인은 알아채기 어렵다.

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영국인은 만나자마자 상대방의 계급을 확실히 구별해 낸다. 계급에 따라 다른 단어를 쓰거나 다르게 발음하는데, 그 방식이 무척 다양하고 복잡하다. 점심을 '디너'(dinner), 저녁식사를 '티'(tea), 화장실을 '토일렛'(toilet)이라고 말하면 노동계급이고, 저녁을 '디너'(dinner)나 '서퍼'(supper)로, 화장실을 '루'(loo)나 '래버토리'(lavatory)라고 말하면 상류계급이라는 식이다.

옷차림으로도 알 수 있다. 번쩍거리고 지나치게 차린 옷을 입으면 신분이 낮고, 유행에 뒤처지고 오래된 듯한 옷을 입으면 신분이 높다. 상류층 남자는 여름에도 긴 바지에 긴 소매 셔츠를 접어서 입고, 상류층 여인은 대개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에 야단스럽지 않은 수수한 옷을 입는다. 집의 정원도 계급을 말해 준다. 상류층 정원은 연한 파스텔 톤으로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럽고 여유로운데, 하류층 정원일수록 강한 원색으로 질서 정연하고 화려하다. 집을 장식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나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골동품을 자랑스러워하고 바닥은 나무로 되어 오래된 페르시안 카페트가 깔려 있다.

영국인은 계급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계급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마치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양 행동한다. 돈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돈벌이에 큰 가치를 두지 않으며, 명예와 고귀함 같은 정신적인 가치와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을 중요시한다. 개인의 행복이 아닌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거나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즐긴다.

내가 본 영화에서 귀족은 마을 주민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는데, 내가 만난 보통 사람들도 그랬다. 이웃에 살던 존 할아버지의 옷차림은 허름했고, 그의 정원은 가꾸지 않은 듯 자연에 가까웠다. 직원의 결혼식 날, 그는 신랑신부에게 자신이 수집한 앤티크 자동차를 타게 해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황홀한 드라이브를 선사했다. 내 친구 하워드는 자신의 생일날 친구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대신 함께 돈을 모아 어려운 학생을 도왔고, 스텔라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만든 코스 요리를 대접하는 것으로 수익금을 만들어 기부했다. 얼마 전 은퇴한 제니는 이제 자원봉사만 한다.

영국인은 신분 상승을 바라지 않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 않는다. 나이, 성별, 지위에 위아래가 없다는 평등 의식으로 서로 동등하게 대한다. 각자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행복이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이득과는 상관없는 '내가 모르는 타인을 위한 고상하고 고귀한(noble and respectable) 일들'을 하며 산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영국을 이끌어가는 진정한 힘이라 믿는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