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술은 가짜 황제…전두환은?
※이번 추석 연휴 기간 대한민국 헌정사 속 3명의 독재자,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그림자와 빛을 삼국지라는 거울로 비춰 봅니다. 네이버에서 '시사 삼국지'를 검색해보세요.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이 맞을까?
언론 보도에서 그를 부르는 호칭이 점차 '전 대통령'에서 '씨'로 바뀌고 있다. 처음 한번만 그가 대통령 출신임을 표기한 후 계속 전두환 씨라고 부르는 게 사실상 표준이 됐다.
그 배경의 하나로, 내란범 확정 판결을 받아 전직 대통령 예우 대상에서 일찌감치 제외된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를 말과 글로도 전직 대통령이라고 지칭하는 게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전직 대통령을 이제 더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는 맥락인데, 애초에 그를 대통령으로 쳐 주기 어렵다는 해석도 나온다.
전두환은 1979년 12·12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후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선, 일명 체육관 선거(서울 장충체육관 개최)에 단일 후보로 나가 11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2천525명 대의원이 투표해 2천524명이 찬성했다.
불과 1년 뒤인 1981년 12대 대통령에 뽑힐 땐 좀 달랐다. 그러나 구색만 좀 갖췄을뿐 맥락은 같았다. 체육관 선거를 살짝 개조한 대통령선거인단제도로 진행됐다. 미국 대선을 얼추 모방한 것. 우선 국민이 직접 5천278명 선거인단을 뽑고, 이들이 다시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 방식이었다.
급조한 선거인단은 물론 관제야당 후보들을 '짜고 치는 고스톱' 식으로 끼워넣은 것도 비판의 대상이다. 11대 대선과 달리 12대 대선에는 전두환 단일 후보가 아닌 총 4명의 후보가 출마해 뭔가 경쟁하는 구도를 보여줬다. 하지만 당시 야권 유력 주자였던 김대중과 김영삼 등은 공권력에 의해 나오지 못했다. 유치송(민주한국당), 김종철(한국국민당), 김의택(민권당) 등 그때는 물론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희미한 관제야당 후보들이 출마했고, 당연히 당선은 전두환(민주정의당)의 몫이었다.

▶결국 전두환은 2차례 대통령 모두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선거로 선출됐다는 게 핵심 포인트다.
모두 3차례 대통령을 맡은(1, 2, 3대) 이승만과 한번 비교해보자.
이승만은 1대 대선에서는 정상적으로 선출됐다. 헌법에 따라 국민이 뽑은 1대 국회의원들이 선출했다. 문제 삼을 여지가 없다.
이어 이승만은 2대 대선에서는 국민이 직접 투표하는 직선제에 의해 뽑혔다. 대선의 룰이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달라진 건데, 문제가 있었다. 사정은 이랬다. 원래는 첫 대선이 그랬듯이 2대 대통령은 2대 국회에서 뽑아야 했다. 그런데 2대 국회가 여소야대가 돼 버렸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 힘들어졌다. 이에 반대파 의원들이 억류된 상황에서 대선 방식을 직선제로 바꾸는 '발췌개헌'이 이뤄진 것이다.
이어 3대 대선. 이미 2차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은 원래 3대 대선에는 도전할 수 없었다. 헌법에 많이 해도 두 번까지만 하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제한이 '사사오입개헌'에 의해 '초대 대통령(이승만)에 한해 폐지'된 것이다.
다만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이 이승만의 당선을 무조건 보장한 건 아니다. 룰을 유리하게 바꾸긴 했으나, 직선제인만큼,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한 경쟁은 이승만의 몫이었고, 승리했다.
여기까지는 이승만이 전두환에게 우위에 있다.
그러나 그랬던 이승만은 4대 대선이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가 되면서, 대선 자체가 무효가 되면서, 헌정사 최초의 부정선거에 폭발한 4·19혁명에 의해 하야했다.
이어 역대 최다인 총 5차례 대통령을 맡은(5, 6, 7, 8, 9대) 박정희와도 비교해보자.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는 직선제로 치러진 5대 대선에서 윤보선에게 단 15만6천26표 차이로 겨우 이긴 바 있고, 이후 내리 당선된 6대(윤보선에 승)·7대(김대중에 승) 대선도 직선제였다.
여기까지는 박정희가 전두환에게 우위에 있다.
그러나 10월 유신 후 박정희가 당선된 8, 9대 대선이 바로 전두환도 11대 때 경험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선이었다.
참고로 이승만과 박정희 사이, 윤보선은 3·15부정선거로 인해 다시 치러진 4대 대선에서 내각제에 따라, 마치 이승만이 첫 대통령에 뽑혔을 때와 비슷하게 의원들에 의해 4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최규하는 10·26사건으로 김재규가 쏜 총에 죽은 박정희의 잔여 임기를 채우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보궐 대선을 통해 10대 대통령에 뽑혔다. 이어 안 그래도 짧은 잔여 임기를 채우기도 전에 전두환이 단독 출마한 11대 대선이 열리면서 물러났다.

▶이런 전두환의 정치 행적에 비유할 수 있는 삼국지 인물을 꼽으라면 바로 원술이다.
우선 혼란을 틈 타 권력을 차지한 게 비슷하다. 전두환은 10·26사건으로 혼란한 틈을 타 한달여 뒤인 12·12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다시 수개월만에 대통령이 됐다.
원술은 190년 반동탁연합군이 결성되고 동탁이 죽은 후 그 뒤를 이은 이각·곽사 역시 황제를 두고 치고박고 하느라 혼란하던 197년 황제를 참칭(僭稱, 분수에 넘치게 스스로 임금이라 칭함)했다.
황제를 칭한 근거가 있었다. 옥새다. 그런데 이 옥새는 손견이 우연히 주운 것을 후계자 손책이 지니고 있다가 원술에게 병력을 얻기 위해 담보로 잡힌 것.
옥새까지 가졌으나 원술은 정당성을 얻지 못했다. 실은 옥새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선 진짜 황제(헌제)는 조조에게 옹립된 모습으로나마 존재했다. 그리고 원술은 사치와 수탈에 민심을 잃었고 전쟁에서도 거듭 패했다. 결국 원술은 가짜 황제 취급을 받았다. 진짜 옥새는 가짜가 됐다. 사실 옥새란 옥으로(이후 금으로 만든 '금보'도 옥새로 지칭) 만든 인장(도장)일 뿐이다.
전두환은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선거로 뽑혔으나, 즉 옥새를 얻은듯 보였으나, 단독 출마 체육관 선거(11대 대선)와 관제야당 동원 선거(12대 대선)에는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태부족했다. 더구나 전두환을 멈춰 세운 1987년 6·10민주항쟁의 골자가 직선제 요구였다.
박정희와 한 번 더 비교해보자.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쉽게 가도 됐을 첫 대선에서 직선제로 윤보선과 붙어 승리, 나름의 명분을 얻었다. 이어 윤보선을 한차례 더 무찔렀고, 김대중도 제압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야권 유력 주자들과 제대로 붙어본 적이, 국민으로부터 제대로 선택 받은 적이 없다.
PS. 한편, 원술과 전두환의 최후는 많이 다르다.
원술은 비참하게 죽었다. 세력을 잃고 떠돌다 피를 한 말이나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전두환은 퇴임 후 김영삼 정부의 과거 청산 작업에 따라 12·12군사반란, 5·18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수천억원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1995년 구속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하지만 결국 3심(대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확정받았고, 과거 청산을 하겠다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1997년 특별사면을 해 주면서, 전두환은 2년여 감옥 생활만에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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