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독립기념관 건립 추진위원으로 함께 활동
"가혹한 역사 꼭 기억…한일 젊은이 함께 미래 열길"
"너무 젊은 나이네요."
94세의 이용수 할머니가 81세의 일본인 오카다 세쓰코 씨를 만나 처음 건넨 말이다.
지난 9월 24일 오후 5시 30분 수성구 들안길 용지봉 한정식당에서 국적도 삶의 이력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났다. 이 만남은 정인열 매일신문 논설위원이 중재하고, 우대현 대구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준비위원장이 자리를 마련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자리에는 우대현 준비위원장과 정인열 논설위원 이외에도 김상보 사성김해김씨 종회종친회장, 최봉태 법무법인 삼일 대표변호사 등이 동석했다. 오카다 세쓰코 씨를 포함한 참석자 전원이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 발기인이다.
94세의 이용수 할머니는 모두가 알 듯,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삼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보상 운동에 앞장서온 인물이다.
81세의 오카다 세쓰코 씨는 도쿄공무원, 시즈오카 현립대학 교수를 거쳐 2013년부터 대구에서 사회복지시설 '즐거운 우리집'을 설립하여 가정폭력을 당한 아이들을 돌보아왔다.
나이에 대한 덕담으로 평화롭게 시작되기는 했지만 가해자로서의 일본과 피해자로서의 식민지 조선의 역사가 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결코 편할 수만은 없는 만남이었다.
이용수 할머니가 먼저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열었다.
"나는 대만 신주 가미가제 부대의 위안부로 있었어요. 열여섯 살이었어요. 오빠도 일본의 전쟁에 끌려나가 죽었지요. 힘든 세월이었어요. 몸 여기 저기에 칼에 찔린 상처는 물론이고 그 시절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나쁜 일본인만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역사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오랜 기간 힘을 보태고 있는 일본인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일본인들은 일본놈이 아니고 일본인이죠"
이용수 할머니가 16세의 나이로 일본군 위안부로 대만에 끌려간 1944년, 오카다 세쓰코씨는 겨우 5살이었다. 5살의 오카다 세쓰코씨도 윤택한 유년기를 보냈던 것은 아니었다. 오카다 세쓰코씨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일본 최대의 조미료 회사 아지노모토(味の元) 연구원이었던 아버지가 연구원자리를 사직하고 낙향했기 때문이다. 아지노모토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협력하여 전범기업이 된 것이 이유였다.
"아버지는 일본의 행위에 대해서 자신 나름대로 속죄를 하고자 평생 직업을 갖지 않고 닭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오카다 씨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자리를 버린 아버지 때문에 저희 가족은 형편이 참 어려웠습니다. 아직은 어린 아이들이었으니 아버지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불평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난해도 얼마든지 품위있게 살 수가 있다. 그 점을 잊지말기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제가 한국에 와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한 것도, 한국의 역사 위안부 문제에 긴 세월 관심을 가져온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카다 세쓰코 씨 아버지의 속죄이야기 덕분인지 이용수 할머니는 한국말이 서툰 오카다 세쓰코 씨를 위해서 기억 속에 넣어둔 일본어를 꺼내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머리에 떠올리는 것조차 싫을 과거의 순간 순간을 기억해내었다. 그 자리에 동석한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기억은 정확했고, 이야기는 논리적이었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했음에도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있었고 눈빛은 빛났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정의연 사태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이용수 할머니의 말과 눈빛에서 신념의 강렬함과 순수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이용수 할머니는 역사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원해준 일본 시민단체 운동가라든가 학자의 이름을 꺼내었다. 그중에는 오카다 세쓰코 씨가 아는 사람도 있었다. 오카다 세쓰코 씨 본인도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역사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같은 관심을 지닌 지인들과 의견을 교환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 내용 중에는 가마쿠라에 위치한 자신의 집 책꽂이에 꽂혀있는 위안부와 수요집회에 관한 책에 관한 것이라든가, 수요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차례 한국을 방문한 지인에 관한 것도 있었다.
오카다 세쓰코 씨는 사진과 책을 통해서만 접하고 있던 이용수 할머니를 직접 만난 일에 상당한 감동을 받은 듯했다.
"일본에 있는 제 지인들이 제가 이용수 할머니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했다면 많이 놀랄 겁니다. 우리 모두 책을 통해서 이용수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었고 사진으로 얼굴을 접해왔습니다. 우리들에게 이용수 할머니는 한일역사의 문제를 넘어, 올바른 신념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가치로운 것인가를 가르쳐준 분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한일관계의 미래로 연결되었다. 만남 말미, 오카다 세스코 씨가 이용수 할머니의 기억력과 건강을 부러워하자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의 건강의 비결로서 신념과 사명감을 꼽았다.
"식민지 시기 동안 일본에게 내가 당한 일을 후대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신념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습니다. 알리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하니까요." 아울러 다음의 말을 강하게 덧붙였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 사람들이 역사를 정확하게 알기를 바랍니다만 그들이 그 역사에 발목을 잡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는 역사를 기억하면서 서로 힘을 합해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한일관계의 해법과 미래에 관해 오카다 세쓰코 씨역시 이용수 할머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가 일본인으로서 대구독립기념관건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은 지난 역사에 대해서 사죄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일본이 행한 식민치하의 가혹한 역사를 현재의 일본인들에게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를 올바르게 수용하지 않은 사회는 결코 제대로 설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일본을 위해서 일본 젊은이들에게 정확한 역사를 반드시 알려줘야 합니다."
만남이 끝나는 시점에 이르자, 이용수 할머니와 오카다 세쓰코 씨 사이에는 더이상 어떠한 벽도 없었다. 언어의 차이, 국적의 차이, 삶의 이력의 차이는 물론, 식민치하 역사가 만들어낸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깊은 틈도 사라져버렸다. 함께 이루어나갈 미래만이 남아있었다.
헤어지면서 오카다 세쓰코 씨는 만남의 첫 순간 이용수 할머니가 건넨 나이 덕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제 겨우 81세이니 젊은 열정과 힘을 모아서 제게 주어진 사명을 꼭 완수하려고 합니다. 그 사명감이 있는 한 저도 이용수 할머니처럼 건강할 것입니다."
이용수 할머니와 오카다 세쓰코 씨의 만남은 해법을 찾기 어려웠던 한일 관계에 작지만 큰 길을 열어주었다. 두 사람이 과거의 짐을 떠맡았으니 미래를 여는 것은 이제 남은 우리의 몫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낡은 세대의 짐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의 말이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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