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의 꿈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심리상담가'였는데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을 살려 주고 싶었다. 육체를 고치는 의사는 아니지만 정신을 고쳐준다는 게 보람 있을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OOO 어학원 영어 강사였다. 학창 시절 재미없었던 영문법이 토익을 공부하니 꽤 재밌었다. 왜 하필 OOO 어학원이었을까? 브랜드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구에도 학원이 많았지만 OOO은 가장 먼저 시작했고 클래식한 이미지가 있었다. OOO에 입사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스타 강사가 되는 꿈을 꾸곤 했다.
"서울 본사에 이사님을 만나보시죠. 이런 내용은 본사에서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OOO 어학원 동성로점 원장님의 소개로 서울 본사의 이사님까지 만나게 되었다. 이사님 역시 기존 광고와는 다른 그 무언가에 대해 목말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 회사의 포트폴리오 역시 마음에 들어 하셔서 공감대는 쉽게 형성되었다.
미팅을 잘 마쳤지만 우리 회사엔 핸디캡이 있었다. 바로, 지방 기업이라는 인식이었다. 서울에도 유명한 광고 에이전시가 많은데 굳이 대구에 있는 기업에 일을 맡기실까 염려되었다. 결국 결정은 리더가 하기 때문에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질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간절함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OOO에서 우리에게 광고를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포트폴리오만으로 우리를 평가해준 것에 감사했다. OOO 강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광고인이 되어 그 브랜드를 알리게 되어 기쁨이 더 컸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계약서를 쓰자마자 엄청난 책임감이 밀려들었다. 계약금 역시 컸고, 나의 꿈이었던 브랜드라 정말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날부터 엄청난 고생이 시작되었다. 도서관에 처박혀서 작업에만 집중했다. 밥에 물을 말아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아이디어에 매달렸다. 오히려 그런 방법이 부담이었는지 아이디어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발표일이 되었다. 계약된 내용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준비해갔다. 인쇄 광고 한 장이 계약 범위였지만, OOO의 장기적인 브랜드 전략까지 개발했다. 발표 장소에 가니 각 지점의 원장님을 비롯 10명이 넘는 분들이 기다리고 계셨다.
한 달 동안 준비한 아이디어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발표할 때 광고인은 느낌상 분위기를 알아차린다. '이 아이디어가 반응이 좋구나' 아님 '무슨 저런 걸 가지고 왔어?' 광고주가 말하지 않아도 분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발표가 진행되면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의 아이디어가 전혀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걸 눈치 챈 것이다.
발표 후 피드백을 듣는 자리에서 역시 직언들이 날아왔다. 내가 만든 광고의 방향이 옳다면 방어라도 해볼 텐데 그들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그들은 당장 여름 방학 때 수강등록을 위한 광고 한 장이 필요했던 거였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다. 수강생 등록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토익과 인문학을 접목한 아이디어를 발표했던 것이다. 너무 멀리 갔다.

"토익은 사람 공부다"
그때 들고 간 카피였다. 경쟁사는 "토익은 기술이야"라는 상업 광고의 끝을 달린 카피를 내걸고 있었다. 난 OOO의 브랜드 이미지가 그것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토익을 시험으로 보지 않고 도구로 봤던 것이다. 토익을 공부해 취업을 하는 것도 결국 인간관계의 관점으로 봤다. 아무리 토익을 잘해도 입사 후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면 허사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원한 여름 방학 때 학생들 등록을 위한 광고가 아니었음은 인정했다. 그렇게 처참하게 실패하고 나는 대구로 내려왔다. 기차 안에서 온갖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지방 기업의 한계인가...?'
광고인이 자신을 의심하면 크게 무너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아이디어에서 조금 떨어져 객관성을 갖는 건 필요하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밀고 나갈 수 있는 자신감이 더 중요하다. 그것을 서울에서 잃어버리고 대구로 왔다.
2차 발표까지 5일의 시간을 받았다. 두 달 동안 준비한 시안이 거절당하고, 5일 만에 탁월한 아이디어를 만들어야 했다. 5일 동안 영남대 도서관에 처박혀 작업만 했다. 발표일이 다가오는데 아이디어가 보이지 않을 때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광고인은 지옥에 가서라도 아이디어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5일 동안 숨도 못 쉬고 아이디어를 찾으러 다녔다. 2차 발표 때에도 실망한 클라이언트의 얼굴을 보는 건 죽어도 싫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작업에 매달렸다.
내가 학생이 되어 보았다. '돈 없는 학생들이 수강료 내며 학원에 가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니 답이 보였다. '결국, 성적 향상이다. 내가 토익 500점이면 800점, 900점 맞으려고 학원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누가 토익 점수 뒷자리를 바꾸고 싶어 학원에 가겠어. 수강료를 내는 건 토익 점수 앞자리를 바꾸고 싶어 가는 거지' 이렇게 문제가 풀렸다.

550점이라는 성적표를 그려봤다. 뛰어나지도 못하지도 않은 평범한 성적이었다. 그리곤 성적표 종이를 오려보기도 하고 접어보기도 했다. 묘하게 앞자리를 접으니 '5'자의 끝이 '9'자와 맞아 떨어졌다. '그래 학생들은 학원에 이런 걸 기대할 거야. 500점대의 점수가 900점대의 점수가 되는 것. 앞자리 숫자를 바꿔 주는 것' 이렇게 작품 준비는 의외로 쉽게 끝났다.
2차 발표 날, 우리는 최대한 간단하게 제안서를 준비했다. 1차 발표 때는 광고 기획 의도까지 서술했다. 그런데 2차는 달랑 광고만 준비했다. 거리에서 광고를 보게 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기획 의도를 설명할 수 없다. 광고주를 광고주라 보지 않고 일반인으로 생각하고 발표했다. 그랬더니 발표 시간이 3분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상입니다"라는 말로 나의 발표는 끝났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실무진의 표정을 살폈다. OOO 측의 첫마디는 이랬다.
"이것이 우리가 빅아이디어한테 기대한 수준입니다."
드디어, 5일 동안 참았던 숨이 쉬어졌다. 비로소 식욕을 되찾았고,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울역을 향했다. 대구로 내려오는 KTX 밖 풍경이 원래 그렇게 아름다웠던 걸까? 우리나라는 자연 환경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지난주 내가 본 암울했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OOO은 학생들이 많이 타는 지하철역에 이 광고를 게재했다. 포털사이트와 홈페이지는 물론 강남지점은 대형 현수막으로 이 광고를 걸었다. 서울에 있는 지인들이 광고 사진을 찍어 내게 보내주곤 했다. 그들도 나도 함께 자랑스러워했다.
사람들은 주로 앞자리 5가 9로 바뀌는 이미지를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OOO은 앞자리를 바꿉니다"라는 카피가 주효했던 것 같다.
이 광고로 큰 매출을 올렸지만 가장 값졌던 건 '자신감'이었다. 우리 스타일대로 밀어붙이면 더 큰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더불어 지방에 있는 기업이라고 졸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나와 우리 직원들이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 OOO과의 작업이 끝나고 회사가 한 단계 성장했다는 걸 느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경험을 큰 매출과 함께 동시에 잡았던 것이다. OOO 광고를 만들며 죽을 뻔했지만, 회사는 그만큼 더 단단해져 갔다.

㈜빅아이디어연구소 김종섭 소장.
'광고인의 생각 훔치기' 저자
광고를 보는 건 3초이지만 광고인은 3초를 위해 3개월을 준비한다. 광고판 뒤에 숨은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김종섭의 광고 이야기]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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