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창비 펴냄
아파트 16층 높이의 발전소 공장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 중인 해고노동자 이진오는 페트병 다섯개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붙여주고 그들에게 말을 걸며 굴뚝 위의 시간을 견딘다. 매섭게 춥고 긴긴 밤, 증조할머니 '주안댁', 할머니 '신금이', 어릴 적 동무 '깍새', 금속노조 노동자 친구 '진기', 크레인 농성을 버텨낸 노동자 '영숙'을 불러내는 동안 진오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자신에게 전해진 삶의 의미를 곱씹는다.
"그것은 아마도 삶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지속된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낸다."(207쪽)
소설가 황석영이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로 한반도 100년의 역사를 꿰뚫는다.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그리고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다루고, 사료와 옛이야기를 넘나들며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문학적으로 구현해냈다. 구상부터 집필까지 30년이 걸린 역작이라고 한다.
'철도원 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최근까지 100년 근현대사를 철도원 가족 삼대에서 공장 노동자인 증손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서사를 통해 노동 이야기로 풀어낸 대작이다. 굴뚝 위에서 농성하는 증손 이진오의 입을 통해 앞선 삼대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원고지 2천 매가 넘는 분량임에도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현실감있는 캐릭터로 황석영의 저력과 장편소설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제목처럼 소설은 1대인 철도공작창 기술자 이백만, 2대인 철도 기관수 첫째 아들 일철과 3대 이지산, 발전소 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4대 이진오로 이어지는 철도원 가족 이야기가 큰 축을 이룬다.
공장이 밀집된 서울 영등포지역을 중심으로 한 삼대의 서사 속 이일철, 이이철 형제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을 고증하며 울림을 준다. 형 일철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철도종사원양성소를 거쳐 당시 드물었던 조선인 기관수가 되어 이백만의 자랑이 되었으나, 동생 이철은 철도공작창에 다니다 해고당한 뒤 공장노동자를 전전하며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는다. 이철과 함께 활동하던 것으로 그려지는 이재유, 김형선, 미야케 등 실존인물이나 이철과 아지트 부부였다가 실제 부부 연을 맺어 아들 장산을 낳게 된 한여옥,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최달영, 이철의 독립운동 연락책을 맡았던 박선옥 등의 인물은 형제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이야기 속에서 여성 인물들의 활약도 돋보인다.
황석영은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 근현대문학에서 "단편소설에 비해 훨씬 질과 양이 떨어지는 장편소설 부분과 그중에서도 근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소설이 드물다"고 지적했다.
이 책은 우리 문학사에서 빠진 산업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근현대 100여년에 걸친 삶의 노정을 거쳐 현재 한국 노동자들의 삶의 뿌리를 드러내보고자 한 결과물이다.
소재를 철도 산업 노동자로 잡은 이유에 대해서 황석영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경공업인 양말 공장, 두부 공장 이런 것과는 좀 다르게, 철도, 강철 이런 것은 근대 산업사회를 상징하는 중공업이다. 이걸 노동자들의 핵이라고 한다"면서 "근대 산업사회의 중심이 되는 노동자가 철도 노동자"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 소설을 창작하게 된 동기와 관련해서는 1989년 방북 당시 만났던 '고향 어르신'과의 일화를 들었다. 당시 황석영은 백화점에서 만난 '아버지뻘' 부지배인의 고향이 자신과 같은 서울 영등포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만나 술잔을 나누며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했다고 한다. 황석영은 "그 사람 과거를 듣게 됐고, 그래서 이걸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한기욱은 "염상섭의 '삼대'가 구한말에서 자본주의의 등장까지를 펼쳐 보였다면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는 일제강점기와 분단의 역사, 현재의 노동운동까지를 다룬바, 이 두 작품을 함께 읽는 데서 한국문학의 근현대가 완성된다"고 평했다. 620쪽, 2만원.
▷황석영은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중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단편소설 '탑'이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다룬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을, 2000년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변혁을 꿈꾸며 투쟁했던 이들의 삶을 다룬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모티프로 한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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