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박연(博淵) 속에서 금붕어으로 지다

입력 2020-05-25 11:42:09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팀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팀

이장희는 박연(博淵)속 자유를 꿈꾸며 살다간 시인이다. 박연(넓은 연못)은 모순적 조합으로 그의 짧은 생애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단어이며, 육필 원고조차 남기지 않은 그의 유일한 친필이다. 이 글귀는 자살 후 백기만이 펴낸 <상화와 고월>의 책 속에 사진으로 박제되어 있다. 이장희는 섬세하고 관능적이면서 특유의 회화적 기법을 통해 시대를 앞서간 근대시의 선구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반일과 항일의 지역문인인 이상화와 현진건, 이육사의 빛에 가려 오랫동안 저평가 받았다. 그는 1900년 대구 태생으로 초명은 양희이고, 아호는 고월이다. 20세에 장희로 개명한 뒤 1924년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하면서부터 줄곧 이 이름을 사용하였다. 시인으로 첫발을 내딛는 계기도 그렇거니와 시적 세계관 구축에 있어서도 불우했던 유년기와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 불화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음독자살로 인한 그의 이른 죽음도 이러한 시인이 처한 가족사적 현실의 모순과 갈등의 연장선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고월의 아버지는 이병학으로 대구에서 중추원 참의(參議)를 지내면서 실력자로서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3명의 부인과 21명의 자녀를 두었다. 고월은 첫 번째 부인의 삼남으로 태어나 일찍 여읜 어머니를 대신한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들의 질시와 갈등 속에서 자랐다. 이런 환경은 그를 내성적이고 시니컬한 성격으로 만들었다. 이병학은 1911년 오구라 다케노스케를 도와 남선합동전기회사의 전신인 대구전기회사 설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조선미술품제작소를 직접 운영하면서 오구라가 조선의 문화재를 수탈하면서 만든 오구라콜렉션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년기의 가정환경과 친일 행적으로 부를 쌓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대립, 삶의 불화에서 역설적으로 시인으로서 시발점과 시작 활동에서 표현되는 섬세하고 관능적인 기법의 근간을 찾을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수재라 불리던 고월은 대구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가업을 잇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와 든든한 지원 속에서 13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소망과는 달리 고월은 당시 일본에서 형성되던 근대시와 시인 하기와라 사쿠다로, 야마무라 보쵸오 등의 작품을 접하면서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시인으로서의 모습을 그려갔다. 본격적인 시작 활동은 목우 백기만의 주선으로 <금성>의 동인이 되면서부터인데, 1924년 <봄은 고양이로다>등 4편을 시작으로 <여명>, <신여성>, <조선문단> 등에 총 42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발표된 작품 중 34편만이 전하며 8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최근 지역의 문화예술단체와 예술인들에 의해 아카이빙된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한 그의 삶과 작품이 공연예술로 점진적으로 조명되고 있어 그에 대한 대중적 인식 확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스물아홉 해라는 짧은 생을 자살로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바닥에 자유로이 헤엄치는 금붕어를 그리며 의도치 않은 아이러니한 삶에 대한 회한을 드러냈던 이장희. 박연이라는 상반된 글귀처럼 자신만의 작지만 넓은 세계에서 최대의 저항을 하며 자유를 꿈꾸었을 그의 모습은 이제 옛 문우에 의해 몽타주로만 전하고 있다. 아카이빙된 자료를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표박하고 있는 고월의 젊은 날의 초상이 지역 문화예술의 다양한 형태로 조금 더 풍성한 풍경으로 그려지기를 기대해 본다.

박명현 대구문화재단 예술진흥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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